그리스도교 교회 혹은 이주민들의 공동체

초대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주민들의 교회였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보면 초대 교회가 어떤 식으로 이주를 통해 확장되었는지 알 수 있다.

초대 교회가 이주민들의 교회였던 이유는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로마의 도로망을 따라서 이주와 정주를 반복했다. 바오로 사도가 쓴 서간문들 수신처 거의 전부가 로마 도로망의 거점 도시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교회 개념은 독특하게도 신앙으로 묶인 가족으로, 이는 혈연이나 신분, 계급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인종과 무관하게 노예와 정숙한 귀부인이 함께 신앙을 나누는 혼성 공동체가 되었다. 바로 이 혼성성이 교회 구성원들을 매우 다문화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혼성 공동체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앙으로 묶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애덕을 가장 큰 가치로 삼았고, 특히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그 가치의 구현으로 인식되었다.

환대하는 공동체

확실히 교회의 이러한 특징은 구성원 상당수가 노예나 해방 노예, 과부나 일반 여성과 같이 사회에서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 이들인 것에 한몫한 것 같다. 분명히 초대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박해를 멈추고 이에 더 나아가 주교들을 관료로 삼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엘리트들의 종교는 아니었다. 심마쿠스라는 제국 고위 관료가 대체 화제가 되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관련 도서를 찾아보려다가 실패했다는 사례는 초기 교회가 썩 지적인 분위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반면 가난한 이들, 이방인들, 여행자들, 방랑자들에 대한 관심은 마치 오늘날의 사회복지망을 연상시키듯이 매우 높았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같은 교부들 역시 박해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비참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방인과 이주민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거지들이 벌린 손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열린 하늘 밑이나 동굴, 길거리와 시장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음식은 그냥 그들의 운수에 맡겨진 것이요, 그들이 마실 것이라고는 말처럼 샘물 정도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음료수 잔은 그들의 손이며 식탁은 그들의 무릎이다.”(니사의 그레고리오, 'De Pauperibus Amandis')

이러한 관심 속에서 교회는 이들에 대한 애긍시사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예컨대 바실리오 성인이 증언한 것처럼 이방인들이 잠시 쉬면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환대의 집들을 특히 대성당 주변에 설치했다. 이런 환대의 집이 설치된 것은 순교지에 설립한 대성당이 순례자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면서 마찬가지로 막대한 기부금과 봉헌금이 가난한 순례객들과 부랑자들을 먹여 살릴 재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실리오는 카파도키아 총독 엘리아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이 교회의 기금을 함부로 낭비하고 있다는 고발에 대해서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가 여행[순례] 중에 우리를 방문한 손님들이나 병으로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숙소를 만들고 이들을 돌볼 간병인과 의사, 노새나 관리인과 같이 필요한 일처리를 할 사람들을 임명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이미지 출처 = grunge.com)
(이미지 출처 = grunge.com)

이러한 환대의 집은 수도원 운동이 벌어지면서 곧 수도원의 주된 역할이 되었다. 서유럽의 수도원 운동이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요한 카시아노는 환대를 모든 수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여 수도자들은 수련기부터 겸손과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환대를 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지어 여행객이나 순례객, 이방인들 맞이하고 환대하기 위해서 수도원의 금식조차 깨어도 좋다고 권고했다.

“신랑[예수님]이 그들[수도자들]과 함께 있는데 신랑의 자녀들이 금식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손님]가 떠나면 그들은 적절하게 금식을 하여야 할 터입니다.”(요한 카시아노, 'Institutiones')

모르긴 몰라도 수도사들은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기를 무진장 바랐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손님들은 정말 그들을 찾아온 예수님이었을 테니까. 교부들의 글들과 수도원 회칙에서 우리는 내면화된 환대 정신을 많이 발견했다. 그리고 이 내면화된 환대 정신이 나중에 언급할 이주신학의 기념비적인 문헌이 될 '엑술 파밀리아'(Exsul Familia, 비오 12세, 1952년)의 토대가 되었다.

의외로 활발했던 중세의 이주

우리의 선입견으로는 중세는 상당히 고착되어 있는 세상이다. 장원제라든가, 농노제라든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중세 유럽의 사회제도들은 이러한 선입견을 형성하는 데 한몫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입견들은 역사적 사실과는 꽤 다르다. 일단 중세라는 시대 구분 자체가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르네상스까지 너무나 길게 설정되어 사실 이 단어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 서양사에서는 고대 말과 중세 초, 중세 성기 등등 표현으로 시대를 분절한다.

바이킹이라든가, 반달족이나 고트족과 같은 게르만족의 집단 이주를 제외하고 대략 11세기부터 중세 유럽에서는 상당한 인구학적 이주 현상이 일어났다. 서유럽에서 주로 벌어진 농업 이주, 그리고 상당한 숫자의 순례자를 포함하는 종교적 이주-이른바 로마, 예루살렘, 콤포스텔라 같은 순례 중심지로 이동하는 것- 그리고 이촌향도 현상도 있다. 예컨대 10세기 밀라노 인구는 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13세기에는 20만 명의 대도시가 되었다. 프랑스의 상스 지방 성당은 11세기 말에 하나뿐이었지만 13세기에 17개가 있었다. 그 외에도 대학생들의 이주, 상업적 이주가 활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족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 이전 유럽에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없었다. 아시시의 유력한 상인이 프랑스에서 예쁜 프랑스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고 아들을 보게 되면서,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프랑스에서 온 아이라는 뜻으로 프란치스코라고 지어 이 이름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유럽 내 인구 이동에 따라 교회는 오늘날의 이주민 사도직 혹은 교포사목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공의회로 알려진 4차 라테란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는데,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논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하나의 신앙으로 묶였지만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전례와 풍습을 지내는 이들이 도시와 교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엄중하게 이들 도시와 교구의 주교들이 합당한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전례와 언어에 따라 전례적 역할을 다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교회의 성사들을 집전할 것이고 말과 행위로서 그들의 백성들을 가르칠 것이다.”(제4차 라테란공의회, 제9장 'De diversis ritibus in eadem fide')

이렇게 이주민 환대는 고대 말과 중세 교회에서 온전히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한 행동 준칙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에 스며들게 되었다.

 

김민 신부(사도 요한)

예수회 한국관구, 예수회 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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