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학적 새로운 사태

유럽 인구는 흑사병 이후 급속도로 증가했다. 1500년의 유럽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데 250년이 걸렸다. 하지만 1800년의 유럽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데 단 백 년이 걸렸다. 1650년 1억으로 추정되는 인구는 1950년 5.6억으로 증가했다. 로버트 토머스 맬서스의 말대로 유럽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증가하고 있는 인구의 압력에 대해서 유럽 각국의 대응은 달랐다. 프랑스의 경우 거대한 농경지가 막대한 인구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다. 반면 영국의 경우 식량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는 데 허덕이고 있었고 무엇보다 1840년대 감자 대기근은 서민층 이하의 삶의 질을 극단적으로 떨어뜨렸다. 그 대응법은 서민층 이하를 매우 값싼 공장 노동력으로 흡수하거나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 최소한의 사회복지 안전장치였던 빈민법을 고의로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의 지도층들은 맬서스 트랩, 즉 식량 생산량이 인구 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대기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들은 인구를 유출하는 방식으로 인구 압력에 대응하려고 했다. 즉 대서양 건너편으로 이민을 유도했던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사정이 또 달랐다. 독일은 12세기 이후 동방식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엘베강 너머로 진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계 농부들이 볼가강에서 풍요로운 자영농으로 가정을 꾸릴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독일은 유럽 내의 식민화라는 방식으로 인구 압력에 대항하고 있는 셈이었다.

문제는 산업혁명을 통해서 비록 비참한 저임금 노동자 신세일지라도 과잉 인구를 흡수하거나 영토 확장을 통해서 생활공간을 확보할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없는 어정쩡한 나라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탈리아였다.

새로운 이주

이러한 인구학적 압력이라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인류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1840년에서 1880년 사이 유럽인 천만 명이 미국으로 옮겨 갔다. 1880년에서 1930년 사이 그 숫자는 4000만 명에 달하였다. 1907년 한 해 동안에만 128만 5000명이 이주했다. 1876년에서 1900년 사이 이탈리아는 500만 인구를 미국과 남미에 잃게 되었다.

이 새로운 이주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단순히 인구가 많은 유럽에서 공간이 많은 신세계로의 자연스러운 인구 이동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하다. 새로운 이주를 우리는 세 가지 요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기술적 진보.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이주민과 선원 102명을 태우고 잉글랜드를 출발하고 그다음 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절반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1845년부터 뉴욕과 리버풀을 분주히 왕래하며 수많은 이주민을 운송했던 SS 그레이트 브리튼호는 튼튼한 강철로 만들어지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혁명적인 여객선이었다. 이런 기술적인 진보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안전하면서도 가족 단위의 대규모 이주를 할 수 있게 했다. 범선 시대에서 증기기관 시대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이주를 위한 기술이 성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형 여객선 등장으로 이주 비용 역시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둘째, 좁혀진 심리적 거리. 물론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대륙 간의 심리적인 거리도 많이 좁혀진 상태였다. 19세기 초반 전신이 발명되어 1850년대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국제 전신망이 구축되고, 무엇보다 1858년 대서양을 횡단하는 초장거리 전신망이 운영되면서 신대륙은 온갖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굳은 결심과 약간의 금전, 그리고 행운 혹은 하느님의 가호만 따른다면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셋째, 이주민 공동체라는 게이트.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주는 개인 이주나 소규모 이주가 아니었다. 뉴욕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이탈리아인 공동체는 마치 일종의 게이트처럼 이탈리아 출신 신참 이주민들이 손쉽게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다. 이 게이트를 통해서 쏟아져 들어온 이주민들은 포화상태가 된 거점의 공동체를 떠나 신대륙의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새로운 게이트를 형성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이주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왼쪽부터) 피아첸차의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 주교(1839-1905)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성녀.(1850-1917) (사진 출처 = 바티칸뉴스, en.wikipedia.org)
(왼쪽부터) 피아첸차의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 주교(1839-1905)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성녀.(1850-1917) (사진 출처 = 바티칸뉴스, en.wikipedia.org)

새로운 사목

이 새로운 이주 혹은 이주 공동체 형성은 가톨릭교회에 예전에는 맞닥뜨리지 않았던 새로운 도전을 선사하였다. 마리아노 람폴라라는 아주 노련한 바티칸 외교관 출신 추기경은 이주라는 새로운 사태에 대해서 교회가 느끼는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가족과 고향 교구를 떠난 이주민들은 불행히도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에 흩어져서 무심하기 짝이 없는 회의론자들, 불신자들, 타락한 노동자들과 뒤섞여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들을 묶어줄 거룩한 곳도, 성사도, 사제도 없습니다. 이들은 교활하면서도 생기 있는 개신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에 극히 취약합니다. 이들은 곧 그들이 받았었던 기본적인 종교적 가르침도 잊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 사회주의, 혹은 프리메이슨-지금의 우리로서는 농담거리도 안 되지만 당시 이들에 대해 교회는 매우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과 같은 ‘교활하면서도 생기 있는’ 선동이 바로 이주민들을 위한 교회의 새로운 사목 방향을 결정지었다. 1871년 독일 마인츠에서 라파엘회를 설립하여 이주민 사목을 위한 새로운 방식의 사목을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초반에는 라파엘회의 주된 사목 대상자는 독일 식민지를 운영하는 관료들과 독일인 식민자들이었지만, 곧 이 조직은 좀 더 보편적인 이주사목으로 전환하였다. 1883년 미국에서도 비슷한 교회 조직을 만들었다. 특히 피아첸차의 주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는 매우 정열적으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수도자들, 사제들을 동원하였는데, 그가 염두에 두었던 사목은 “자신의 고향 땅을 기꺼이 등지고 원지, 특히 미국으로 가서 경제난으로 인하여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탈리아 출신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들의 조직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스칼라브리니 주교에게서 영감을 받은 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성녀다. 카브리니 성녀는 아메리카의 이탈리아 이주민을 위한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스칼라브리니 주교와 카브리니 성녀는 향후 이주민을 위한 가톨릭 사목과 사도직 활동의 원형이 되었다.

 

김민 신부(사도 요한)

예수회 한국관구, 예수회 인권연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키워드

#김민신부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