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인권연대 '이-팔 분쟁 역사' 세미나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와 원인'을 주제로 게릴라 세미나를 열었다.

11월 29일, 예수회센터에서 아디(ADI, 아시아 분쟁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인권 옹호 활동 단체) 활동가 이동화 씨가 팔레스타인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과 이 사태 이전의 역사를 살폈다.

이동화 활동가는 적어도 1948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극적 역사가 오늘날의 원인이 됐고, 팔레스타인은 늘 전쟁의 상황을 겪어 왔다면서, “그럼에도 하마스를 옹호할 생각은 결코 없다. 그러나 왜 세계가 이 전쟁을 ‘이스라엘 정보전의 실패’로 인식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실패가 왜 우리의 실패가 되어야 하는가. 왜 이스라엘의 평화가 깨져야만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관심을 갖는가”라고 물었다.

11월 29일,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하마스) 분쟁 상황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현진 기자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시작된 하마스의 공격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이어졌고, 분쟁은 11월 24일부터 일주일 간 이어진 휴전 기간을 포함해 63일째다.

11월 27일 당시까지 이 분쟁에 따른 사망자는 이스라엘 1200명, 팔레스타인(가자지구, 서안지구 통합) 약 1만 5000여 명, 부상자는 이스라엘 5600여 명, 팔레스타인 약 3만 9000여 명이다. 11월 24일부터 일주일 간 휴전 상태였지만 다시 교전이 시작되면서,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12월 5일, 하마스 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는 1만 6248명이 되었으며, 그중 어린이가 7112명이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격 양상은 민간인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파트 전체, 병원, 학교마저 폭격하고 있는 탓이다.

국제사회가 민간인 희생을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12월 5일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CNN>에, “하마스 1명이 죽을 때, 민간인 2명이 죽으면 좋은 성적”이라며,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무자비하게 활용하는 테러 조직과 도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이는 '엄청나게 긍정적인, 아마 세계 유일의 비율'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화 활동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따른 희생과 피해 규모로 “유례없는 숫자가 기록되고 있다”면서, “가자지구 인구가 230만 명이고, 한국 인구 5000만 명에 비교해 보면, 가자지구 사망자 1만 4000의 규모는 한국으로 치면 50-60만 명에 해당한다. 그만큼의 사람들이 6주만에 죽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 사망자의 70퍼센트가 여성과 아이들이라는 것이 문제라면서, “전쟁이 워낙 많은 피해를 만들고, 분쟁 지역을 다니면서 피해에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이건 너무 어마어마한 숫자다. 팔레스타인 가족, 인구 구성으로 볼 때, 모든 가정에 사망자가 있는 셈이다. 이것을 과연 전쟁으로 부를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10월 7일의 공격과 이로 인한 분쟁이 처음이라고 보도됐지만, 사실은 최소 56년간 분쟁을 겪어 왔다면서, “10월 7일 이전에는 평화로웠는가? 이스라엘에는 그랬지만 팔레스타인에게는 평화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중심의 서사가 너무 압도적이며, 공존한다고 하지만 힘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땅 문제로 시작된 50여 년 전쟁
국제사회에 덧씌워진 유대 민족의 신화

1948년부터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영토 변화. (자료 제공 = 아디)
1948년부터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영토 변화. (자료 제공 = 아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증오의 역사가 본격 시작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배경에는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욕망과 무책임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터키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영국이 이 지역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와 맺은 비밀 협상인 후세인 맥마흔 서한(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 국가의 독립을 약속), 영국과 프랑스 1차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분할 및 소유 합의(사이크스피코 협정), 결정적으로 1917년 유대인의 전쟁자금지원을 대가로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 민족의 독립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 그러나 이런 협정과 선언은 팔레스타인의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이뤄졌으며, 팔레스타인을 둔 3중 계약이었다.

이후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지주들에게 땅을 샀고, 유대인 난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착이 집중된 1933-35년까지 이주한 유대인 난민과 팔레스타인 원주민 사이의 갈등이 빚어졌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극심한 혼란과 갈등이 이어지던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에서 아랍인 지역과 유대인 지역 분리 독립안이 가결됐지만 무산됐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아 독립과 건국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으로 아랍 각국과 이스라엘 간 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고,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서는 난민 75만 명이 생겨났으며, 이를 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른다. 그리고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결성됐다.

이스라엘이 건국에 이어 영토 확장을 이룬 것은 1967년 3차 중동전쟁 결과다.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불태우고 난민촌도 강제 철거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 약 30만 명이 탈출해야 했다. 이 시기는 나크사(좌절)로 불린다.

이동화 활동가는 이스라엘이 신화처럼 만들어 놓은 서사는 “핍박과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 민족이 오랜 시간 떠돌다가 빈 땅이었던 자신들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 것이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물러난 것”이라면서, 이 서사가 너무 강하게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결하고 분쟁하는 상황이 불편한 이유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국가 대 국가, 적어도 동등하게 주권을 갖는 양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1948년과 1967년이라는 상징적 시기를 통해 팔레스타인은 일방적 점령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1967년 이후 이스라엘 군인들은 서안지구에서 나간 적이 없고, 팔레스타인은 한 번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자치 시기를 살지 못했다면서, “이스라엘의 이런 행태는 명백한 불법이었으며,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협약, 제네바협정을 어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 현황. (자료 제공 = 아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 현황. (자료 제공 = 아디)

정착촌 식민주의, “팔레스타인인은 쫓아내야 할 대상”
두 차례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은 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도 침투했다. 서안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드는 것으로, 이동화 활동가는 “이 정착촌이 이스라엘 사회를 유지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완전히 박탈하는 이른바 정착촌 식민주의라는 것으로 어떤 나라도 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인간을 이토록 미워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면서, 서안지구의 정착촌, 가자지구 봉쇄와 심각한 통제는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 민족이 종교적으로 부여받은 땅이며, 유대인들이 살아야 하는 땅이라는 인식의 실현이다.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으로, 관리하거나 쫓아낼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정착촌은 구획을 정해서 들어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국제사회에서 유력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공존을 위한 양국 방안 실현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두 차례 ‘인티파다’다. 인티파다는 “봉기, 반란, 저항”을 뜻한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 9일 팔레스타인 청년 4명이 이스라엘 군용 트럭에 희생된 사건으로 시작됐다. 6년간 지속된 봉기로 팔레스타인인 1000명 이상이 희생됐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의 점령 실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양측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끌어낸다는 명분으로 오슬로 협정이 이뤄졌다.

‘하마스’ 정당이 등장한 것이 이때다. 1993년 1차 인티파다 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내건 오슬로협정과 카이로협정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하마스는 이런 협정에 응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서 탈퇴해 독자적 길을 걷는다.

2000-05년 진행한 2차 인티파다에서는 이스라엘의 강경 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 3000명 이상 사망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분리장벽을 설치한 계기가 됐다.

이동화 활동가는 팔레스타인이 극심한 열세에 몰려 있고, 분쟁 상황뿐 아니라 일상에도 심각한 탄압을 받고 있지만, 결코 약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면서, “봉쇄와 폭격, 물과 전기를 끊는 상황이 수시로 일어나도, 가자지구에서는 오히려 인구가 늘어난다. 하마스와 같은 대응이 있지만, 평화적으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50여 년간 폭력과 점령, 억압이 일상인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의 미래세대, 아이들에게는 알려진 것과는 다른 역사적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면서, “이스라엘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중동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살아갈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고 말했다.

“10월 7일, 팔레스타인은 가자의 철책을 처음 넘어간 것이다. 하마스가 저지르는 일들이 알려지고 있지만, 그전에 항상 이스라엘의 폭격을 피해서 숨어 지내던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그러나 하마스의 선공격은 분명히 범죄다. 이들은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국민의 삶에 도움을 줘야 하는 존재임에도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과오가 있다.”

2008년부터 2021년까지 4차례 가자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희생자는 2만 1510명, 이스라엘 희생자는 1508명이다. (자료 제공 = 아디)

세미나 중에는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활동가 와일 씨와 영상 연결을 통해 현지 상황을 듣기도 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하마스만의 전쟁은 아닙니다. 서안지구에서는 정말 오랫동안 살해, 방화, 조준사격, 검문 등 이스라엘에 의한 폭력들이 만연했었습니다. 여러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에 특히 아이들은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시온주의 운동의 핵심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는 것입니다. 올리브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공격당하고 수확물도 모두 빼앗기고 있어요.”

와일 씨는 특히 가자지구에서 현재 너무나 큰 파괴와 살상, 피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아이들과 여성들의 피해가 너무 크다. 물과 음식 등 생존과 관련된 것들이 부족하고, 병원 22곳이 운영 중단돼, 입원한 아이들이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하마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며,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 내에는 무슬림, 그리스도교인, 유대인 등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함께 이스라엘에 저항하고 있다. 하마스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가 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화 활동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는 “제노사이드”(특정집단 말살)라며, “팔레스타인이 계속 저항하는 상황이고, 현대 국가에서는 말살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관리하겠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핑계로 희생자 대부분인 여성과 아이들을 죽일 이유는 없다면서, “인권활동가들뿐 아니라 상식 있는 이들, 국제사회, 전문가 등 누구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아니라고, 당장 멈추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지속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이제 가자지구에도 겨울이 오고 있다. 사망자 1만 5000여 명, 부상자 5만 명, 찾지 못한 시신 등 6만 명이 엄청난 고통에 직면해 있다. 주택은 10만 채가 파괴됐다. 연대가 희망이 되어야 할 때”라며, 팔레스타인을 위한 모금, 지원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팔레스타인 후원 안내 https://box.donus.org/box/adians/Gaza_F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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