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El Conde), 파블로 라라인, 2023

'공작'(El Conde), 파블로 라라인, 2023.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br>
'공작'(El Conde), 파블로 라라인, 2023.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칠레를 기억하는 방식, 칠레라는 거울

12.12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 2023)이 곧 개봉한다.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정치군인의 역사적 퇴장을 실감하지만, 우리에겐 군사정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3공화국 말기에 태어난 나는 날 때부터 군사정권하에서 자랐으며, 의식을 깨친 이후 그것은 당연했으며 과연 우리가 군인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심을 품었다. 다른 많은 3세계 국가의 엉망진창인 정치적 상황을 돌아보면,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룬 우리는 정말 운이 좋기도 했고 정말 징하게 열심히 싸웠다. 20대 초반 6공화국 두 번째 대통령 김영삼 정권에 들어서야 우리는 군인 통치에서 벗어났다.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은 거의 ‘레짐’으로 굳어진 군부를 거세한 역사적 쾌거였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많이 퇴진하고 있지만, 제3세계에는 아직도 군부가 통치하는 나라가 많다. 칠레도 한때는 우리처럼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이 나라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박정희와도 통하는 이미지를 지녔다. 사실 칠레의 정치적 여정은 이례적이고 독특한 면이 있다. 1970년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집권함으로써 투표를 통한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을 실험했다. 이때 아옌데는 그 유명한 파블로 네루다와 후보 단일화를 이루기도 했다. 아옌데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의대에 진학하는데, 이후에 빈민들의 질병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으며 사회 투쟁에 헌신했다. 그해 11월 5일 아옌데는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빵과 포도주로 가득 찬 풍요로운 조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칠레의 반동세력과 미국은 이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하기 위한 온갖 공작을 자행했다. 아옌데 정권은 사면초가에 몰렸고, 미국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붕괴하는데,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인 모네다궁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때가 1973년 9월 11일이다.

아옌데 대통령과 피노체트.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3주 전 산티아고에서 함께 찍은 사진 아옌데 대통령과 피노체트.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3주 전 산티아고에서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 inquirer.com)

피노체트라는 뱀파이어, 피노체트라는 블랙 코미디

2023년 올해 칠레 쿠데타 50년을 맞이한다. 이에 칠레 감독 파블로 라라인은 피노체트를 다룬 영화를 세상에 내놓는다. 쿠데타 이후 몇 년 뒤 태어난 그도 나처럼 유년기, 청소년기에 박정희와 전두환 같은 군인 정치가를 보며 자랐듯이 피노체트를 보며 자랐을 터. 또한 나처럼 군부정권에 맞서 싸우던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그는 피노체트를 ‘블랙 코미디’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피노체트는 프랑스 태생 뱀파이어다. 피노체트의 프랑스식 표기 ‘피노슈’, 그는 원래 프랑스대혁명기 단두대 위에서 사라져간 루이 16세의 하인이었다. 자기 주군이 처형당하는 모습에 분개하며 이른바 ‘레드헌터’가 된다. 세상 각지에서 혁명세력을 처단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러다가 문득 ‘마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흘러가고 우리가 아는 피노체트가 되어 칠레를 무단 통치한다. 실제로 피노체트 독재 시절에 축구 경기장은 양심수들이 학살당한 뒤에 화장되는 만행의 장소였다고 한다. 1973년 쿠데타 이후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나는 17년간 3000여 명의 사망자, 1000여 명의 실종자, 수만 명의 고문 피해자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수 빅토르 하라도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가톨릭 사제 7명이 피노체트에게 맞서다가 살해당했다.

감독에 의해 뱀파이어로 묘사된 피노체트는 이제 권력을 놓게 되고, 온갖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죽은 척한다. 영화 속 피노체트는 뱀파이어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멀쩡한 인간이다. 단 러시아 출신 집사만 뱀파이어로 만들어 놓았다. 삶의 의욕도 꺾이고 더는 사람의 피도 섭취하지 않는다. 아무런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자랐던 자식들은 아버지가 꿍쳐 둔 돈을 어떻게 받을 수 없을까 찾아온다. 하여 프랑스인 회계사를 고용하는데, 그는 가톨릭교회가 파견한 수녀였다. 피노체트는 그 수녀를 본 뒤에 한눈에 반하고, 다시 인간의 피를 섭취하기 시작한다. 수녀는 여러 자료를 분석하며 피노체트가 얼마나 해먹고 뇌물을 받아먹었는지 꼼꼼하게 일러준다. 하지만 수녀는 결국 피노체트에 의해 뱀파이어가 되고,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도 교회에서 요청한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는데. 피노체트의 자식들 못지않게 교회는 교회대로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수녀를 파견했던 것이다.

마거릿 대처와 피노체트(1999년) 마거릿 대처와 피노체트(1999년). 대처는 피노체트를 지지했고 보호하고자 했다. (사진 출처 = independent.co.uk)

질척하기 끝이 없는 신자유주의의 늪

영화 속 내용이야 자막으로 보지만, 자세히 들어 보니 내레이션은 영어로 나머지 배역의 대사는 스페인어로 이어진다.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후반부에 가서야 그 궁금증이 뻥 뚫린다. 뱀파이어 피노체트가 수녀를 한참 농락할 때, 영화 속 화자가 갑자기 영화 안으로 날아든다. 피노체트는 그 화자를 보자마자, ‘마거릿’ 하며 놀란다. 또 다른 뱀파이어 아니 심지어 피노체트의 엄마, 피노체트에게 뱀파이어의 피를 물려준 장본인,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총리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다. 뱀파이어 마거릿 대처는 피노체트에게 자신이 그의 엄마라는 사실을 일러주며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영화 후반부의 급반전 이후 피노체트는 주변을 정리한다. 자기의 군복을 몰래 챙겨입고 흡혈을 일삼던 집사도 제거하고, 가족과 관계도 정리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마거릿 대처와 피노체트는 훨씬 더 젊어진 몸으로, 피노체트는 어린아이가 되어 다시 모자관계로 새출발(?)을 하며 영화는 끝난다. 마치 뱀파이어의 흡혈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인류의 착취 체제가 또 다른 버전으로 이어지리라는 암시하는 듯하다.

1915년 피노체트가 1925년 대처보다 열 살이 많음에도, 감독이 마거릿 대처를 뱀파이어로 묘사하고 피노체트를 그녀의 자식으로 설정한 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실제 마거릿 대처는 “[영국의] 충실하고 진정한 친구”라며 피노체트를 칭찬하고, 영국에 있던 그를 보호했다. 이런 사실과 아울러 ‘철의 여인’으로 군림하며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대처를 표현하는 방식이겠다. 신자유주의로서는 대처가 어머니요, 피노체트가 그것을 열심히 따르는 아들 격이리라. 사실 대처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신호탄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상되는 복지 국가를 튼실히 다져가는 영국을 우울한 나라로 만들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의 의료제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 장면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는데, 이처럼 앞서가는 의료보험제도까지 갖추었던 영국의 우울함은 세계의 보물 켄 로치 감독의 몇몇 영화나 화제가 되었던 ‘풀몬티’(The Full Monty)(피터 카타네오 감독, 1997) 같은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민영화를 위시한 신자유주의에 얼마나 이가 갈렸으면, 2013년 대처가 세상을 떠났을 때, 트위터에 올라온 “그녀의 장례식을 민영화하자. 경쟁 입찰에 부쳐 최저가에 낙찰시키자”라는 글이 통쾌하게 회자되었겠는가.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는 쿠데타 이후, 시카고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칠레 경제학자의 주도로 국영 기업과 광산 등의 민영화, 규제 철폐 등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외형적으로는 경제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극심한 빈부격차에 대다수 칠레 시민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우리 돈으로 약 50원)을 계기로 폭발한 대규모 시위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신음해 왔던 칠레 민중의 저항이었다. 이후 2021년 K-팝 팬이기도 한 35세 청년 좌파 가브리엘 보리치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됨으로써, 사회의 진전을 꿈꾸었지만 그리 녹록지 않은 모양새다.

감독은 군사정권체제와 그 당사자에 대한 짙은 악몽을 뱀파이어로 드러내지만, 영화 ‘서울의 봄’에서 그러듯 전두환을 전두환으로 부르지 못하는가(영화에서는 ‘전두광’이라고 한다) 하면 우리의 콘텐츠는 아직 독재자를 순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칠레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잔혹한 군인 통치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깊은 생채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와 군부 독재를 찬양하는 우리의 일부처럼 그들의 일부도 피노체트 폭정기를 찬양할 것이다. 역사는 분명 한방에 쭉쭉 나아가지 않고 퇴행과 진전을 반복할 따름이지만, 수많은 질곡을 꾸역꾸역 이겨내고 더디더라도 어떻게든 전진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 영화는 수많은 칠레 사람에게 딱 반백 년 전 ‘국방색 추억’을 떠올리며 그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기억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의지,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뇌의 소산으로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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