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폐관 위기 면한 김민기의 ‘학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간이 사라지는 데는 분명 달라진 환경으로 더는 그곳을 찾지 않기 때문이겠다. 그럼에도 아쉬워하며 의미 있던 ‘공간’을 지켜내고자 하는 데는 역사성 보존과 그것이 지닌 현재적 의미가 여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수 김민기 선생이 운영하는 학전 소극장이 그의 건강과 재정상 이유로 폐관을 앞두었는데, 다행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비롯해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가까스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폐관을 아쉬워하는 가수와 배우들은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를 결성해 올 상반기에 릴레이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란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팸플릿. ©김지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팸플릿. ©김지환

1991년 3월 세워진 학전 소극장은 한국 소극장 문화의 상징이다. 여기서 김광석이 1000회 공연을 했고, 1994년부터 장기간 공연했던 ‘지하철 1호선’은 독일의 원작 뮤지컬보다 더 높은 평을 얻으며 수많은 관객을 만났다. 2008년 종연 때까지 4000회나 공연한 국내 최장수 뮤지컬로서 15년간 관객 71만 명을 불러 모았다. 게다가 이 뮤지컬은 방은진,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조승우 같은 배우를 배출하기도 했다. 뮤지컬의 노래는 관람 전부터 귀에 한참 익을 정도로 들었는데, 2006년 직접 관람하면서 소극장 뮤지컬이 주는 생동감을 제대로 경험했다. 학전 소극장을 둘러싼 뉴스를 접하며 이젠 점점 아득해지기 시작한 김민기를 소환해 보게 된다.

스승 김민기가 설경구에게 보내는 편지

시대가 만들어낸 신화적 인물, 김민기

1971년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세상에 나왔을 때, 한때는 가사 좋은 노래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곧바로 금지곡이 된다. 아주 가끔 양희은 버전으로 듣곤 했다. 아마 듣는 사람 거의 없던 새벽 라디오 방송에서 금지곡을 몰래몰래 틀던 디제이가 있었던 것 같다. 하여간 이 노래는 금지곡으로 사적 공간에서나 겨우 불렀다. 1980년대에 김민기는 김대중 대통령처럼 신화적 인물이었다. 시대는 서정 가요 한 곡을 투쟁가로 만들었고, 창작 혼에 불타는 한 가수를 신화적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 노래의 생명은 작자의 몫이라기보다 그 노래를 애창하고 그 노래를 부르게 한 시대의 몫이리라. ‘아침이슬’을 비롯해 김민기의 여러 노래 ‘작은 연못’ ‘그사이’ 같은 노래는 성당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널리 불렀다.

그런 김민기를 제대로 만난 사건이 있었다. 1986년 어느 날 시골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수원시외버스 터미널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 레코드 가게에서 ‘아침이슬’이 흘러나온다. 레코드가게에 들어가니 카세트테이프 복사본을 2000원에 팔았다. “심봤다!” 하며 얼른 샀다. 나중에 집에서 듣고 또 들었다. 그전에는 ‘아침이슬’과 ‘친구’ 정도만 알았는데, 놀라운 다른 노래가 많았다. 분위기나 스타일에서는 ‘기지촌’이 가장 매혹적이었다. 듣고 또 듣다가 혼자 듣기 아까워 굴러다니는 공테이프를 끌어모아 더블데커로 복사해 친구들과 나눴다.

‘금관의 예수’

1971년 ‘아침이슬’ 앨범을 발표한 이듬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다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유신 정권에 들어와 김민기의 노래들이 저항 운동에서 불리기 시작하면서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김민기의 앨범 1집은 전량 압수되었으며, ‘아침이슬’은 1970, 1980년대에 저항 문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1973년 김민기는 김지하가 쓴 희곡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고, 이때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로 더 알려진 이 노래는 희곡 도입부에 나오는 시를 토대로 만든 노래였는데,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과 가사가 교묘하게 틀어지면서 엉뚱하게 북한을 지칭하는 왜곡이 발생했다.

1991년 분신 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글 이후 김지하는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적어도 유신 시기 저항시인으로서 김지하는 총기가 가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이 희곡이다. 감리교신학교 사회선교국에서는 이 대본을 극으로 시연한 테이프를 내놓았는데, 금딱지에 둘러싸여 갑갑한 예수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극중 메시지는 무척 의미심장했다. 고등학교 시절 성탄 예술제에서 ‘금관의 예수’를 공연하고자 했는데, 대본을 구하기 힘들었다. 하여 친구들이 각자 분량을 나누어 받아 적고, 그것을 주일학교 교사가 타자로 쳐서 간신히 대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래저래 부담이 되었는지 성탄제에 올리지는 못했다.

문화의 해빙, 우리에게 돌아온 김민기

그렇게 몰래몰래 들어야 했던 김민기의 노래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문화 해빙기를 맞이하며 해금된다. 그때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아침이슬’을 비롯해 한동안 금지곡으로 묶였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때가 때인지라 전설이었던 김민기가 방송에 등장한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한 토크쇼에 출연해 어눌하게 몇 마디 하지만, 노래 요청은 거절한다. 그냥 양희은 버전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방송에서는 그때 처음 들었다.

김민기 선생은 <한겨레> 신문사에서 주관한 ‘겨레의 노래1’ 총감독으로 등장한다. 수많은 노래를 채록해 책을 만들고, 또 공연을 했다. 몇몇 노래를 추려 카세트테이프가 제작되었는데, ‘이등병의 편지’ 등이 실려 있었다. 그 무렵 학전 소극장을 세우고, 1993년 서울 음반에서 김민기 1, 2, 3, 4, 총 4개 음반이 한꺼번에 나와 놀랐다. 본디 이리 음반 낼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학전 소극장을 마련하느라 생긴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음반은 문화사적으로 꽤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간 익숙하게 불렀으나 작자 미상으로 알았던 많은 노래를 확인했고, 우리 문화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가 정리되고 전파하는 데 일조했으니 말이다. 1971년 청년 김민기의 청아한 목소리와 1993년 차분하고 살짝 힘 빠진 중년 목소리 사이의 갭이 있으나 각각 나름의 멋이 있다.

©김지환
©김지환

김창남의 선생의 "김민기"는 가수 김민기의 음악세계를 잘 정리한 최초의 책으로, 김민기의 황금 같은 노래 악보가 상당수 실려 있다. 김창남 선생은 노찾사 1집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15년 전인 2009년 노찾사의 ‘김민기 노래 공연’은 김민기에 대한 몇몇 단상과 그리움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졌던 시간이다. 이 공연은 후배 윤수가 표를 예매해 주어 같이 보러 갔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제는 조금씩 늙어간 노찾사의 멤버들이 여전히 맑고 힘찬 목소리로 김민기의 곡들을 부른다. ‘천리길’, ‘기지촌’, ‘아하 누가 그렇게’, ‘친구’, ‘그사이’, ‘백구’,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주옥같은 김민기의 노래를 차분히 음미했다. 노찾사의 한 멤버는 김민기를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공연은 귀향의 의미를 갖게 되겠다. 노찾사의 연륜이 묻어난다고 했던 소개로 나온 노찾사 멤버의 두 아이가 부른 ‘백구’는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공연이 저물어 가면서 사람들이 앙코르를 외칠 때 힘찬 노래 한 곡과 김민기의 대표곡이자 한 시대의 대표곡인 ‘아침이슬’로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김지환<br>
©김지환

노래가 있어서 우리는 버틸 수 있었다

노래로 힘겨운 시절을 견뎌낸 이스라엘 민족처럼, 김민기의 노래는 암울한 시절을 버티게 해 준 힘이었다. 구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슈니코프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출연했던 오래된 영화 ‘백야’를 보면, 자유를 이야기하며 비소츠키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는 소련의 저항가요 가수로, 비소츠키의 곡이 흐르면 장면을 보면서 김민기가 떠올랐다. 몰래몰래 듣는 노래. 그렇게 금지된 노래를 몰래 듣는 것조차 저항이었던 모든 게 꽝꽝 얼어붙은 ‘겨울공화국’. 우리가 몰래 듣고 부르던 노래가 쌓이고 쌓여 봄을 불러왔는지 모른다. 김민기는 한국 문화사에 깊게 기록될 것이다. ‘아침이슬’ 같은 곡은 음악 교과서에도 실을 만한 시대의 노래다. 또한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지금과 같은 K-컬쳐의 번영, 그 뿌리에는 분명 김민기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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