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사진 출처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사진 출처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편집자 주 : 이 글에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유토피아’
20세기에 유행했다가 지금은 뜸해진 단어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처음 ‘유토피아’의 개념이 제시되었지만,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 이후 일반적으로 널리 쓰였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없다’라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 가 합쳐진 단어다. 한마디로 ‘어디에도 없는 곳’을 의미한다.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이며 평화로운 사회를 말하는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없는 곳’이며 콘크리트와는 더더욱 어울릴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러니 이 제목은 말 그대로 역설을 담았다. 정확한 제목은 아마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가 되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힘이 들었다. 영화는 현실보다 더 잔인한 데다가 끝까지 대답을 주지 않고 끝이 난다. 모든 아파트가 무너지고 한 개의 아파트만이 남았다는 설정도, 자신들의 주민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결국 내 가족, 내 식구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한국의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도 오롯이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기당한 돈을 받으러 황궁 아파트 103동 902호로 찾아오는 영탁(이병헌)은 자기 돈을 갈취한 902호 주인을 살해한 후, 대신 집주인 노릇을 한다. 병든 노모를 돌보며 살고 있는 영탁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대지진으로 모든 아파트가 무너지고 황궁 아파트 103동만이 살아남자, 무너진 아파트 주민들은 함께 살자며 103동으로 모여든다. 고민에 빠진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회의를 한다. 결국,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 이런 말들이 오간다. 
“저 윗동네 oo 아파트 사람들은 예전에 우리한테 얼마나 갑질을 했나요.”
“자기들이 살아남았다면 절대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을 거예요.”

결국, 주민들은 영탁을 중심으로 주변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자신들만의 황궁 아파트를 다져 나간다. 우리 사회 경쟁과 갑질이 단순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소위 계급사회에서 한동안 약자였던 이들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자로 탈바꿈하게 되자, 결국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동일함을 잘 보여준다. 

밤이 되면, 남자들은 조를 이루어서 아파트 밖으로 순찰이라는 걸 나간다. 먹을 것을 구해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능력에 따라 차등적인 분배를 받는다. 신혼부부인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 역시 보호를 받으며(?) 황궁 아파트에 살지만, 간호사였던 명화는 지금의 이 상황이 탐탁지 않다. 그리고 점점 이기적이고 거칠게 변해가는 민성에게 실망과 슬픔을 느낀다. 그렇다고 따로 어떤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현실’ 앞에 빠르게 적응하는 자(영탁), 서서히 적응해 가는 자(민성), 계속 적응하지 못하는 자(명화)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탁은 자신이 아파트의 주민 대표로 뽑히며 자신의 명분을 세운다. 살해했을 때 역시도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물론 우발적 살해였으나 그렇다)
민성 역시 똑같다. 그는 아내 명화에게 말한다.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두 캐릭터는 남성, 가장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그래서 혹독한 현실에서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과 명분을 무겁게 가진 이들이다. 반면 명화는 인류애, 함께, 같이 등과 같은 이상적 공동체 의식을 가진 인물로서 서로 대치된다. 하지만 명화의 캐릭터는 오히려 극 속에서 어떤 방해꾼의 모습으로 전락한 듯 비친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녀 역시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내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순찰하며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민성은 영탁에게 점점 의지하며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른다. 아내 명화가 외부자를 숨겨주는 일에 연루되자 민성은 영탁 앞에 무릎을 꿇고 빈다. 그 일을 계기로 민성은 영탁에게 더더욱 충성을 다짐하고 이제 이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다. 살인이나 폭력 앞에 점점 무뎌지는 감각과 자신들의 생존만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콘크리트 안에서 결국 사람은 더는 살지 못하게 된다.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을 꿈꾸며 나아가는 삶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극의 중반부를 지나 주민들과 외부인들이 아파트 입구에서 대치하며 싸우는 장면은 끔찍하다. 그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들처럼 얽혀 싸운다. 영화는 ‘생존’이라고 하는 긴박한 상황이 주된 설정이지만, 그래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살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죽이고 쳐내는 모습은 지금 현실 속의 우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현실은 그것이 소리 없이 자행된다는 것뿐이다. 

명화가 폭로한 영탁의 실체에 누구보다 분노하는 것은 민성이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존재가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민성은 좌절하고 분노한다. 영탁의 실체가 공개되자 영탁을 중심으로 응집해 있던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간다. 영탁이라는 인물의 상징성은 많은 것을 내포하는데 가부장에 충실한 존재이자, 이 시대의 전형적인 부패한 권력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과 이웃을 속이며 즉, 자신의 실체를 숨기며 잇속을 챙기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사진 출처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사진 출처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사실 영화 속 모든 캐릭터에 공감이 간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 걸은 영탁, 자신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민성,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내고 싶은 명화. 누구라도 다를 것 같지 않다. 모두가 끔찍한 현실에 처한 무기력하고 분열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파트는 내 가족, 내 식구, 나의 보금자리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인간의 본능과 충돌하는 이성, 욕망과 이기심 등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여전히 매번 놀라운 이병헌의 연기와 분열되어 가는 내면을 섬세하게 잘 표현한 박서준의 연기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또 부녀회장역의 김선영 배우까지. 

만약 명화의 주장대로 다 같이 함께 살기를 결정했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졌을까. 
무엇보다 마지막 명화의 질문과 한 주민의 대답은 어떤가. 
“저 여기서 살아도 돼요?”
“살아있으면 사는 거지.”

이것은 또 다른 희망일까, 체념일까. 

요즘 들어 더 흉흉해지는 현실 때문에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던 내가 찾아 들어간 영화관에서, 꼼짝없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영화를 마주 대해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지옥 같은 현실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으면 사는 거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절망을 내포한 또 다른 희망일까. 
그렇다. 정답이 없는 삶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중학생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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