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고명재, 난다, 2023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 고명재의 산문이다.

올해 읽은 산문 중 가장 아름답고 깊이 있는 문장들 때문에 조금씩 아껴 읽게 되는 책이었다. 실제로 기도하듯 매일 아주 조금씩 읽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 한두 챕터씩 읽으면서 여기 쓰인 문장처럼 꿈속에서만이라도 가 닿지 못한 세계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잠들었다.

그곳은 주변 어른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어린 시인이 자란 사랑의 품속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다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의 박탈감, 각박하고 무서워지는 세상의 어둠에서 탈출해 작은 빛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나의 작은 염원 같은 기도였다.

작가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지를, 그가 숙이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삶과 사물이 달리 보이는 진귀하고 고마운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탁월한 글쓰기의 섬광보다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눈빛을 더 좋아하고
‘나’라는 사람의 대단치 않음과 대신 사랑할 수 있는 ‘남’이 참 많다는 것을
나도 별게 아니고 시도 별게 아니지만 나도 용감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과
세상에는 아름다운 시와 소설이 많고 또 아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가득하다는,
그런 이들을 응원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다 보니 시 쓰는 일도 더 행복해졌다는 작가의 이 고백은 지금의 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고명재, 난다, 2023 (표지 출처 = 난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고명재, 난다, 2023 (표지 출처 = 난다)

작가가 자신에게 묻는 이 질문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따라 해보았다.

"너는 평생 아무도 보지 않을 시를 쓸 거야. 홀로 그냥 쓰다가 사라질 거야.
너는 남의 글만 읽다가 지워질 거야. 흔적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래도 괜찮니.
응. 괜찮아.
이제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시에 대한 사랑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차이를 지닌 건진 알 수 없지만 ‘나’라는걸 버리고 나니 모든 게 시원해졌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생각했다.
그가 드디어 우주를 품었구나! 아무것도 두려움이 없겠구나!

너무도 오랜만에 마음이 정갈해지고 맑아지는 책을 읽었다. 덕분에 나 역시 그가 만난 타자에 대한 사랑에 접속할 수 있었다. 고된 일상을 보듬어 준 선물같이 고마운 책이다. 눈이 올 때까지 곁에 두고 오래 읽고 싶은 책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중학생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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