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대런 아로노프스키, 2023. (포스터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더 웨일', 대런 아로노프스키, 2023. (포스터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일까. 가족 간의 사랑일까, 동성애에 대한 비판일까, 종교에 관한 이야기일까. 영화는 아주 묘한 방식으로 주제를 드러낸다. ‘찰리’라는 한 사람과 그 주변인들을 통해 구원과 사랑 문제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주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감독의 메시지는 인물들 간에 간격과 사이에 배치해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찾아내기 어렵다. 영화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허상과 종교적 오류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런 종교적 억압이 현대 인간을 어떤 몰이해로 바라보게 하는지를 예리하게 고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시선이 따뜻하다. 감독은 찰리를 앞세워 이야기하지만 낮고 조용한 톤으로 따뜻하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방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주인공 찰리. 그는 글쓰기 강사다. 동성애자이며 이혼을 했고 혼자서 살아간다. 그의 몸은 일반인들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며, 200킬로가 넘는 지나친 과체중으로 기침을 하거나 심하게 웃기만 해도 호흡곤란을 겪을 정도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찰리가 그토록 심각한 체중 증가를 일으킨 요인은 사랑했던 연인, 앨런의 죽음 때문이었다. 찰리의 동성 연인 앨런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가족들과 교회 공동체에서 버림받고 결국 자살한다. 유일하게 아픈 찰리를 돌봐 주고 있는 간호사 리즈. 그녀는 앨런의 여동생이다. 즉, 죽은 자기 오빠의 연인인 찰리를 돌봐 주고 있는 것이다. 

앨런의 죽음은 찰리와 리즈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고, 그런 그들 앞에 젊은 선교사 토마스가 찾아온다. 그는 주기적으로 찰리의 집을 방문해 하느님을 믿으라고,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짐짓 토마스는 아주 독실한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공금을 횡령해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그런 그가 찰리에게 와서 구원을 이야기한다는 설정은 사실상 다수 종교인이 빠져 있는 자기 모순과 이중적 실체를 보여 주는 듯하다. 

또 찰리에게는 자신을 버렸다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찰리의 딸 앨리가 있다. 앨리는 마음속에 아빠에 대한 분노와 버려짐에 대한 상처가 깊다. 그래서 뭐든 제멋대로이고 소위 말하는 문제아로 자라난다. 앨리의 엄마는 ‘걔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한다. 하지만 아버지 찰리는 딸에게 ‘너는 최고야’ ‘너는 정말 멋져’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라며 지속적이고 한결같은 지지와 격려, 믿음을 보여 준다.

'더 웨일'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더 웨일'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인간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엄마의 표현대로 악마 같다던 앨리는 그녀 특유의 솔직함으로 토마스의 부모님과 교회 공동체에 연락해 토마스가 용서받고 공동체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소위 사람들이 또는 교회에서 죄인이라고, 악이라고 규정짓는 앨리가 사실상 토마스를 구원한 셈이다. 찰리는 그런 딸의 모습에서 ‘사람은 사람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사람은 놀라운 존재’라고 말한다. 찰리는 딸의 마음, 앨리 안의 사랑을 본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는 구원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스테레오 타입의 사회에서 지금의 종교가 가진 권위적 사상과 교리적 억압, 그 안에서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더듬어 보게 만든다. 어쩌면 이 영화 자체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종교의 만행을 드러내고 있다고도 느껴진다. 한마디로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그런 인간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사랑, 그 사랑을 전파한다는 교회가 역으로 인간을 단죄하고 억압하는 집단으로 변해 가는 지금 기독교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사건과 인물 사이에 스며들 듯 잘 보여 주고 있다. 

인간 위에 종교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으며 이루어져야 할 하느님의 말씀은 없다. 그러나 교회는 종종 반대로 나아간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은 누구인가. 

'더 웨일'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더 웨일'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동성애자 찰리. 그의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딸 앨리. 그들은 종교인 토마스의 눈으로 볼 때는 죄인이며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겠지만, 정작 그들에게 구원을 외치던 토마스를 구원해 준 이는 반항적이고 제멋대로인 앨리였다. 또 일찍 죽었을 앨런을 그래도 버티게 해 준 것은 연인 찰리였고, 리사는 찰리에게 당신 덕분에 오빠가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찰리는 딸 앨리의 에세이–모비 딕 이야기에 집착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딸이 쓴 에세이를 읽어 달라고 말한다. 찰리는 모비 딕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자신과 딸 앨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에이해브는 앨리이며 백고래는 찰리다. 앨리는 백고래에 대한 한없는 연민을, 에이해브에게는 자기 객관화를,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를 위한 작가의 다정한 배려까지를 두루 간파한다. 찰리가 딸 앨리의 에세이가 완벽하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앨리가 자신을 사랑하며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아이라는 것을 찰리는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앨리가 쓴 에세이는 사실 찰리에 대한 상징적 연민과 이해의 언어였다. 딸의 에세이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찰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는 또 하나의 상징적 장면이다. 찰리에게 앨리는 또 다른 구원이었다. 

영화는 아주 슬픈 이야기임에도 시종일관 어딘지 모르게 따뜻했다. 차갑고 냉혹한 현실이지만 그 따스함은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려는 찰리의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찰리의 모습은 아주 천천히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약자들의 슬픔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 여전히 예수의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슬픔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런 의미로 우리 모두는 죄인일 것이다. 문득,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이 떠오르는 가을밤이다. 

인간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뿐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중학생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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