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다. 한낮의 전주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고 종종 더워서 옷소매를 걷어야 했다. 꽃들은 졌지만 여전히 바람이 불면 어딘가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코끝에 닿는 새침한 바람을 영원히 잡아 두고 싶었다. 바람이 헤집어 놓은 나의 설렘을. 그것은 순전히 너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지 않은 삶에 대해 생각한다. 굳이 이곳 전주까지 와서 영화를 보는 이유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적어도 내게는 나의 좁고 작은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일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 세계가 주는 생경함이 다시 나의 세계로 들어와 확장되는 경험. 나에게 영화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이번 24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이유다. 

더군다나 지루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문화적 해갈을 할 수 있는 영화제는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는 보석 같은 행사들이다. 영화제를 주최하는 실무자들의 갈등과 내부적 상황, 그들의 사익이 단순히 영화가 좋아서 먼 곳을 찾아 영화를 보러 가는 이들의 열정을 꺾고 발걸음을 끊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것 같지만 갈 사람은 갔고 볼 사람은 보았다. 나는 이색적인 영화를 보는 즐거움과 영화를 통해 사색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었다. 한낮의 전주는 특유의 고풍스러움과 고요함이 결박당한 듯 보였지만 웬걸, 극장 안은 그 어느 때보다 젊은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그중 유독 이색적인 영화가 눈에 띄었다. '붉은 사과의 맛'. 
제목부터가 시선을 끈다. 이스라엘 영화다. 이번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보았던 몇 편 영화 중 유독 가슴속에 오래 남는 영화였다. 영화는 시리아 내전 중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 드루즈족 마을의 이야기다. 그곳에는 존경받는 족장 카멜이 있다. 그의 형은 어떤 이유에선지 47년간 마을을 떠나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다가 골란 고원으로 돌아온다.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영유권이 모두 인정되지 않는 영토 분쟁 지역이다. 그곳에는 이슬람 근본주의하의 무장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카멜의 형은 골란 고원에서 중상을 입고 동생 카멜이 있는 마을로 몰래 돌아와 치료를 받고 있었다. 

'붉은 사과의 맛'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붉은 사과의 맛'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카멜과 함께 마을 또 하나의 수장인 한 친구(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는 카멜에게 형을 빨리 마을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적이 되어 싸운 형을 마을 사람들에게 얘기해서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협박한다. 또 카멜의 딸이 자신의 큰아버지를 치료해 주는 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린다. 그는 붉은 사과 한쪽을 칼로 잘라 먹으며 말한다. 

“너의 큰 아버지가 죽은 너의 엄마를 겁탈했던 건 알고 있니?”

딸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큰아버지를 경멸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진실을 묻는다. 
결국, 형은 치료를 받자마자 마을을 떠난다. 떠나면서 형은 카멜에게 말한다. 그때 나는 너무나 어렸고 (카멜과 그의 아내가 결혼하기 전으로 보인다) 그 일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속죄한다. 카멜의 형은 자신을 혐오했고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47년을 떠돌며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 반전은 그런 형을 꼬드겨 먼저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동네의 또다른 수장, 형을 빨리 쫓아내라고 말했던 카멜의 친구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계획한 일이었고 그의 형은 그날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그의 계획에 얼떨결에 동참했으나, 자신이 얼마나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를 계속 참회하며 살았다. 

형은 말한다. 

"수치심이었어. 도무지 수치심이 들어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붉은 사과는 성서의 선악과의 또 다른 상징으로 읽힌다. 두 사람은 성서에서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 일종의 금지된 과일을 먹고 난 뒤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그들은 두려움에 하느님을 피해 도망치고(숨고) 자신들의 알몸에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다. 카멜의 형은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쳤다.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죄를 감추는 행위이다. 즉, 카멜의 친구와 같은 행위다. 

같은 죄를 지은 두 사람은 이후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 준다. 한 사람은 거리낌 없이 진실을 왜곡하며 자신의 죄를 숨겼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수십 년간 참회하며 떠돌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같은 결과를 맞이한다. 마지막 또 한 번 반전을 보여 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인간의 수치심에 대해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수치심은 양심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것은 카멜의 형처럼 비록 죄를 지었으나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오랜 수치심(양심)이 진실을 밝히는 용기와 참회의 시작이었다고 믿는다. 

영화 ‘붉은 사과의 맛’은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그에 따른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인간 본성과 도망친 양심이 진실에 도달하는 거리를 (47년) 영화적 상징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중학생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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