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죽이는 정책과 사회, '탈자본'과 '탈노동'으로 위기 극복해야

이 글은 <가톨릭평론> 40호(2023년 여름) 특집 '윤 정부 1년, 복지를 돌아본다'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최근 윤석열 정부의 주 60시간 노동시간 연장 구상은 많은 공분을 불렀다. 2000만 노동자의 열망과는 전혀 다른, 전적으로 사용주의 편에 선 정책도 문제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향상을 꾀하는 세계 추세와도 맞지 않다. 나아가 세계 최고의 산업재해를 억제하기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데다 다시 완화하려는 조짐도 안 보인다. 원래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먹고 살지만 윤 정부는 아주 노골적으로 노동자의 피와 살, 뼈까지 자본 속으로 갈아 넣으려고 한다. 이에 맞서 노동자는 사람이기에 저항을 한다. 이를 제도화한 것이 노동3권, 즉 단결권, 교섭권, 행동권(헌법 33조와 노동조합및 노동관계조정법)이다. 윤 정부는 이 헌법 정신마저 깡그리 무시하고 법을 농락한다. 이 글에서는 윤 정부 아래 후퇴 일로를 걸어온 노동복지 현실을 노동시간, 산업안전, 노동인권 등 세 가지 차원에서 살피고 대안 을 제시한다.

노동시간

자본주의는 한편에서 자연의 생명력(자원), 다른 편에서 사람의 생명력(노동)을 토대로 돌아간다. 이런 면에서 자본은 그 본성 자체가 파괴적이다. 이를 더 현실적으로 보면, 자본 진영 힘이 셀수록 자연과 노동은 무한정 파괴되고 억압, 수탈, 착취된다. 반면 노동 진영 내지 시민사회 진영 힘이 세어질수록 자본의 파괴성은 완화, 수정, 세련화 한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특히 유럽 자본주의가 보이는 모습이 곧 세련화한 자본주의다. 흔히 한국인의 눈에 유럽 사회가 현실적으로 가장 인간다운 사회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그러나 유럽 자본주의가 미국 자본주의보다 신사적이고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그 본질 역시 자연과 인간 노동 파괴에 기초한다. 다만 그들은 그 파괴성의 비용, 위험, 책임을 제3세계나 잘 보이지 않는 자연 속으로, 또는 자국 내 빈민층이나 이주민 그리고 차세대에게로 떠넘기기(전가)를 함으로써 가시 범위에서 빼냈을 뿐이다.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가장 직접적인 매개고리는 노동시간이다. 같은 임금을 주면서 노동시간을 연장할수록 자본이 가져가는 잉여노동(이윤)은 커진다. 또 같은 노동시간이라도 노동 강도를 더 높여 일을 빡세게 시킬수록 역시 잉여노동은 늘어난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각종 인사조직 제도를 혁신하거나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 간 경쟁은 원래부터 인간 사회에 있는 본성이 아니라,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본질을 모르는 일반인 눈에는 그것이 그저 경제의 본성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나마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하겠다는 ‘민주’ 내지 ‘진보’ 지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자본의 본질에 대한 심층 고찰이 부재했기 때문(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삼성경제연구소 자료를 토대로 정책 논의를 했다)이고, 다른 편으로는 현실적인 진보 정책을 관철할 사회 세력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관철되었던 것은 사회 대다수가 ‘자본주의는 필연으로 파시즘을 부르고 결국 전쟁까지 부른다’는 진실을 뼛속 깊이 인지했기 때문이다. ‘탈자본’의 문제 의식이 광범위한 사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사회 변화에 결정적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시간의 퇴행 시도가 나온 것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발판 삼아 자본 진영이 다시 힘을 뭉쳐 진격한다는 증거다. 2022년 12월 12일, 노동 전문학자들로 구성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가 주 69시간 노동제를 발표한 것은 21세기판 ‘12·12사태’였다. 그 실체는 자본진영인 전경련이나 경총, 상공회의소에서 주야장천 요구해 온, ‘탄력근로제 정산 기간 연장’이다. 현재는 2주일 단위 또는 3개월 단위로 노동시간을 평균해 ‘주 40시간’만 맞추면 초과근로수당(50퍼센트)을 추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제안은 그 정산 기간을 12개월로 늘린다는 게 핵심이다. 이는 곧 1년 내내 자본 이 노동을 마음대로 부리고도 아무런 추가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물론 형식적 요건(특정 주 노동시간 69시간, 특정일 노동시간 12시간 준수)만 갖추면 위법이 아니란 이야기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합법적으로 도둑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최근엔 오세훈 서울시장이 노동시간 연장을 측면 보조하기 위해 ‘외국인 가사도우미’ 지원책을 내놓기도 했다. 어린 자녀들과 가사노동에 대한 걱정 없이 자본 아래서 노동을 ‘자유롭게’ 오랫동안 할 수 있게 해 주겠 다는 발상이다. 이런 것을 서울대학교 법대 출신의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 노동부 장관, 그리고 고려대학교 법대와 사법고시 출신 서울시장이 배후 조종 내지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니, 분노를 넘어 참으로 서글퍼진다.

세계는 주 4일제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TBS 시민방송이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세계는 주 4일제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TBS 시민방송이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산업안전

영화 '다음 소희'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애환과 죽음을 다룬다. 제목이 암시하듯, 오늘도 내일도 노동자가 죽어 나간다. 제조업, 건설업, IT산업 등 분야가 따로 없다. 모두 살려고 일하러 가는데, 죽어서 돌아 온다. 노동 안에서 삶과 죽음, 이게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이다.

2023년 5월 8일 어버이날, 꽃 한 송이 달고 자식들과 즐거운 분위기 를 느껴야 할 노동자가 또 숨을 거두었다. 63살 하청 노동자인 그는 약 10일 전, 인천의 T산업개발 복합시설 신축공사 현장에서 전기 케이블트레이를 설치하려고 기둥 사이 공간을 설치하다가 4.5미터 아래로 추락했다. 그간 병원 치료에도 끝내 숨졌다. 그리고 바로 그 어버이날 오후, 대전의 한 산업단지 조성공사 현장에서 D에너빌리 티 노동자 E 씨(65살)가 이동식 쇄석기(원석이나 바위를 파쇄, 모래나 자갈을 생산하는 기계) 벨트컨베이어 하부에 끼여 숨졌다.

이런 식으로 죽어가는 노동자가 1년에 2000명이 넘는다. 노동부 통계상으로만 그렇다. 실제로는 그 몇 배라 추정된다. 엄연한 산업재해(4일 이상 치료가 필요한 중상 또는 사망, 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공식 등재)를 단순한 공상公傷 처리(3일 이하 치료를 요하는 경미한 사고로 사업주 위로금으로 종결) 또 는 노동자 개인 잘못으로 끝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사망사고는 주로 안전사고가 대부분이지만, 그 10-20%퍼센트 ‘과로사’ 가 차지한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너무 빡세게 일해 죽는 것이다. 물론 과로사건 안전사고건 사람이 죽고 또 다치는 것, 먹고살려고 일을 하는데 죽거나 다치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총체적 ‘일 중독’ 사회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일 중독을 조장하고,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일 중독을 내면화한다. 그 결과가 반복되는 산업재해이고,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이 예사로 죽고 다친다.

한편 여기서 안전사고가 80퍼센트 이상 차지한다는 것은 일반인이 보기에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일이 해마다 일어나는 것은 자본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사생결단하기 때문이다. 행정부와 사법부, 입법부는 이 자본의 사생결단을 근본적으로 제어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본 돈벌이는 당연시한 채, 그 떡고물만 어떻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산업 평화’를 잘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2022년 1월 말부터 시행한 ‘중대재해처벌법’이 바로 그 증거다. 위 D건설사업장은 공사금액 50억 원 이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며, 이번 사고 이전인 4월 22일에도 건물 외벽 유리 청소를 하던 하청 노동자가 10미터 아래로 떨어져 숨졌는데,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산재사고는 건설업에서 가장 많다. 노동자 목숨을 철근이나 시멘트보다 값싸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례(제조업)도 있다. 2022년 5월경 A 씨가 운영하는 플라스틱 성형 용기 제조공장에서 사출성형기 내 플라스틱 찌꺼기(스크랩) 제거작업을 하던 노동자 B 씨가 금형에 끼어 숨졌다. 공장장 C 씨는 안전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B 씨가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보고받고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업주 A 씨와 공장장 C 씨가 검찰에 기소된 것은 그 뒤 1년이나 지난 2023년 5월이다. 그 사이에(2022년 12월) 또 다른 사업장(자동차부품 제조)에서도 이주노동자가 기계에 머리가 끼여 숨졌다. 이렇게 죽음은 시시각각 빈발하고 수사나 처벌, 예방은 지지부진하다. 이런 식으로 ‘제도적 살인’이 반복된다.

이런 면에서 자본이 1차 범죄자이지만 입법, 사법, 행정 역시 2차 공범들이다. 나아가 이른바 전문가들(학자나 변호사들) 역시 3차 공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사업장의 경우 원청업체 대표가 형사 처벌을 받는다고 규정함으로써 처음부터 산업안전에 만전을 기하도록 강제한 것이 ‘중대재해처벌법’인데, 학자나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이 법을 우회하려고 노력한다. 일례로 이들은 중 대재해처벌법상 사업주의 의무 위반과 하도급업체 근로자의 사망사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며, 형사 처벌의 핵심 요건인 범죄 사실 인정 여부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힘들게 제정한 법의 고유 취지나 핵심 정신을 도외시한 채, 어떻게 하면 처벌을 모면 할지에 전력 집중하는 꼴! 모두 돈 때문이다. 돈의 노예들, 성공한 노예들에겐 돈과 권력만 보이지, 사람과 그 눈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도 사회적 세력관계 속에 돌아간다. 한편(자본과 국가)에서는 돈과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고, 다른 편(노동과 시민사회)에서는 그 일방성을 제어하려고 든다. 하지만 대체로 결론은 돈과 권력 쪽으로 쏠린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과연 해마다 죽어가는 수천 명 노동자를 누가 책임지고 살려낼 것인가? 그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누가 응답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일이 내일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 누가 이 질문들에 책임 있게 답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기회만 되면 주야장천 ‘자유’를 수십 번씩 외쳐 대는 윤석열 정부 아래서는 ‘죽지 않고 일할 자유’나 ‘노동자의 자유’를 찾아보긴 어렵다는 점이다.

서울의 한 대규모 건설 현장. “무고한 죽음을 막고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정책"이 시급하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서울의 한 대규모 건설 현장. “무고한 죽음을 막고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정책"이 시급하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노동인권

해마다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메이데이)’로, 노동자가 하루 휴식을 취하며 노동시간 단축 역사, 노동인권 역사를 되새기는 날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만 50살 건설 노동자 1명이 분신했고, 다음 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소속의 지대장이었던 양회동 씨가 5월 1일 오전, 강릉시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분신 항거를 했다. 치명적인 화상을 입은 그는 전문병원인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하루만에 사망했다. 그가 분신 항거한 이유는 (검찰에 따르면) “조합원 채용, 노조 전임비 지급을 강요한” 혐의 등으로 3개월 내내 수사를 받아 왔고, 구속될 지경에 내몰린 것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부당하고 억울했기 때문이다.

양 씨의 유서엔 “제가 오늘 분신을 하게 된 건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니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는다”며, “영원히 동지들 옆에 있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건폭(건설업계 폭력행위)’이란 새 용어를 써 가며 건설노조와 조합원들을 범죄시하는 태도를 일관 되게 보여 왔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건설노조가 왜 고용을 두고 단체 교섭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업계 특성은 고려하지 않고 대통령부터 정부 부처, 수사기관까지 무작정 ‘건폭’ ‘공갈’로 몰아가니 이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건 ‘혐오 살인’입니다”라며 양 열사의 주장을 지지했다.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 헌법 33조에 나오는 노동자의 단결권에 의거한 것으로,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권익 향상을 위한 자발적 조직이다. 무려 서울 법대 출신이자 사법고시 출신인 대통령이 이러한 실정법조차 깡그리 무시한 채 오히려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집단 활동을 거세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이미 앞서 암시했듯이, 자본은 노동의 생명력을 먹고 살면서도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고 싶어 저항을 하거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 무한정 억압하려 든다. 그래야 약탈과 착취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설사 노동자나 그 조직이 사회 공인을 받고 교섭 당사자로 참여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노동과 자본을 내면화한 상태에서 이뤄진다. 자본 입장에서는 예전보다 이윤 폭이 작아지긴 해도 노동 진영이 근본적인 노동 거부(자본 저항)를 하지 않는 상태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현 정부의 노동 억압 태도는 (‘민주정부’ 의 비교적 노동 친화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무한증식 욕망을 반영한 대리인 역할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미 정치권력 자체가 자본과 일체화한 상태다. 즉 국가와 자본은 동 전의 양면이거나 이미 한 몸인 상태다.

이런 면에서 현 국민의힘 정당은 물론 대안 세력으로 여겨지는 민주당 같은 야당들조차 자본을 넘어서 사고하고 자본을 뛰어넘은 세상을 열려는 비전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다. 현실 지형상 ‘어쩔 수 없어서’ 민주당을 뽑는 것이지, 민주당이 권력을 잡는다고 ‘탈자본’의 세상을 열 것이라 누구도 추정하긴 어렵다. 따라서 정치권이 이런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대다수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은 이래도 억울하고 저래도 억울한 현실을 반복해서 맞을 수밖에 없다.

사실 노동자의 분신·자결 항거는 1970년 11월 청계천 의류 노동자 전태일 이래 무수히 계속되어 왔다. 전태일의 외침은 단순, 소박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 이 말라.” 1986년 3월에도 신흥정밀 기계 노동자 박영진 씨가 분신 항거했다. 그는 한 일기장에서 “모두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노동자 스스로가 깨어나 함께 일어서지 않으면 절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2003년 1월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열사도 분신 항거했다. 그는 정리해고 반대 투쟁 후 힘겹게 복직은 되었으나, 회사 측 탄압이 지속되자 분신했다. 그 유서엔 “얼마 전 구속자 선고재판 어처구니없이 실형 2년이라니, 두산은 사법부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공정해야 할 재판부가 절차를 거쳐 쟁의 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 자의 법이 아닌가?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내가 먼저 평온한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것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어 2003 년 12월, 한진중공업 비정규 노동자 김춘봉 씨 역시 자결했는데, 그 유서엔 (강요된 명퇴 후 촉탁직으로 재고용) ‘비정규직의 설움’이 넘쳐난다. “24년간 회사를 위해 몸과 청춘을 바쳤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렇게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는 한탄과 함께 “(작업 중 다리를 다쳐 10개월 요양한 뒤)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 시달리며 명퇴 권고를 받았다”고 해 명예퇴직이 강요된 것이었음을 폭로했다. 또 2015년 5월, 포스코 사내 하청 이지테크 노조원 양우권 씨는 해고자 복직 및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로 힘겨운 투쟁을 하다가 끝내 자결했다. 그의 유서엔 “제가 바라는 것은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해고자 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2023년 5월, 강릉 건설 노동자 양회동 씨의 분신이 있었다. 그는 건설노조 동료들에게 쓴 유서에서 “윤석열의 검찰 독재정치, 노동자를 자기 앞길에 걸림돌로 생각하는 못된 놈 꼭 퇴진시키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꼭 만들어 주세요”라고 썼다.

노동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조합에 가입, 활동하는 것은 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노조를 중심으로 회사와 단체교섭을 벌여 노동 조건이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한다. 만일 그것이 제도로 어렵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이나 태업 등 집단행동을 결행한다. 이 모든 과정은 법으로 정당한 절차를 밟게 되어 있다. 그간 수많은 노동자가 이른바 ‘불법 행위’ 혐의로 수억, 수십억, 수백억 원대 ‘손해배상, 가압류’를 당해 왔고, 가정이 파괴되고 목숨이 약탈되고 노조가 무력화됐다(그러나 부자들인 의사들이 파업하면 ‘시민의 생명을 볼모로 잡음에도’ 아무 제지를 않는다). 그래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들은 가능한 한 ‘합법적으로’ 활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노동자의 마음을 자본과 그 공범들이 알아줄 리 만무하다. 최근 양회동 열사의 유서에도 “먹고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오늘 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아야 한다. 억울하고 창피하다”는 심경이 솔직히 표현돼 있다. 나아가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한 것뿐인데, 윤석열 검사 독재정치의 제물”이 되었다 며(윤 정권이) “자기 지지율 숫자 올리는 데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또 죄 없이 구속되어야 한다”고 정부의 노동 정책을 비판했다.

그렇다. 극우보수 정당인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자신과 자식들이 주로 노동자임에도) 정부가 노동조합을 때려잡을수록,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로 만들수록 ‘정부가 잘한다’고 박수친다. 이런 경향은 2022년 두 차례에 걸친 화물연대 파업 때도 잘 드러났다. 윤 정권이 노동자 파업에 강경 대처하고 전혀 협상이나 타협 여지를 보이지 않자 보수층 지지자들 은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한 것. 이런 성향은 이른바 ‘중도층’ 내지 일부 ‘진보층’에게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 역시 한국 경제가 성장 일변도로 잘 달리고, 해마다 높은 성장률 내지 높은 수출액을 보일 때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대통령이 더욱더 민주적이고 보다 포용적이면 ‘좋은 지도자’라고 할 뿐이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본질 문제에 대한 의식은 별로 없다. 그런 의식을 가진 층은 아주 얇다. 좀 자세히 보면,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두려움이 대다수의 마음에 깊이 깃들어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빨갱이’라는 사회 낙인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양 씨조차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돼야 하겠느냐”며 “제발 윤석열 정권을 무너트려 달라. 당(야당들) 대표님들,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물론 윤 정권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설사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이 권력을 잡더라도 앞서 말한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사회적 분위기가 정말 다르게 변하지 않는 한, 동일한 비극이 반복된다. 안타깝지만 ‘불편한 진실’이다.

6월 21일에서야 5월 1일에 스스로 분신하여 숨진 고 양회동 씨 영결식을 진행했다. 서울대병원부터 광화문까지 시민과 사제, 수도자, 신자들도 함께 뒤를 이었다. ⓒ정현진 기자<br>
6월 21일에서야 5월 1일에 스스로 분신하여 숨진 고 양회동 씨 영결식을 진행했다. 서울대병원부터 광화문까지 시민과 사제, 수도자, 신자들도 함께 뒤를 이었다. ⓒ정현진 기자

‘탈자본’과 ‘탈노동’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그래서다. 노동시간을 좀 줄인다고, 또는 임금을 좀 올린다고, 산업 재해 없이 노동을 계속한다고, 나아가 노동3권을 보장받는다고, 정권 이 바뀐다고 해서 자본의 본질이 바뀔 리 없다는 것까지 보아야 한다. 물론 뭔가 ‘조금은’ 낫겠지만, 근본적으로 ‘탈자본’의 새 차원을 열지 못하는 한 세상은 자본의 편이지 노동의 편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을 부단한 과정으로 본다면, 그 1단계는 민주화(탈보수, 탈극우 사회), 2단계는 탈자본화(자본의 이윤 원리를 넘어가는 사회), 3단계는 심층생태화(생명과 물질의 경계가 사라지고 만물이 한 생명으로 여겨지는 사회)로 설정함이 마땅하다.

원래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6세기 베네딕토 수도원의 기본 철학은 결코 ‘노동의 신성함’을 찬미한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혼과 몸, 영과 육, 지와 행, 주와 객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마 이것은 그 이전 노예제 사회에 대한 근본 성찰과 비판의 결과일 것이다. 노예제 사회는 혼과 몸, 주와 객의 분리를 전제한 위에서 노예를 단순히 ‘말하는 도구’로 취급하며 야만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말기인 16세기에 들어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나 프랑스의 장 칼뱅(1509-64)은 부패하고 타락한 구교를 비판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했다. 이게 이른바 ‘종교개혁’이다. 그러나 혼과 몸, 영과 육, 지와 행, 주와 객의 분리를 전제로 한 신교(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찬미는 자본주의 발달에 적극 이바지했다. 그리하여 ‘문명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인 제3세계를 ‘개화’하기 위한) 성실한 노동과 부 축적은 구원 징표가 되었다. 한편으로 농민을 농토로부터 축출한 인클로저 운동이, 다른 편으로 식민지 개척을 문명국이 야만국을 개화시키는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된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근대화’를 해 주었다고 우기는 근거 역시 동일한 뿌리다. 윤 정권 역시 이런 논리 기초 위에 서 있다. 이 모든 결과 21세기 오늘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일하는 ‘과로사’마저 불사하는 일 중독 시대, 성장 중독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윤 정권 아래서 (앞서 살핀, 노동시간, 산업안전, 노동인권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사상 초유의 어불성설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노동의 역사를 진지하게 통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노동의 위기나 공동체 위기, 경제 위기 외에도 우리는 (초)미세먼지, 기후위기, 지구온난화, 자원 고갈, 생태계 오염과 훼손 등이 모두의 삶을 위협한다. 인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 모든 문제가 급격히 악화한 것은 자본주의 500년, 특히 최근 100년, 그중에서도 아주 최근 30년의 일임을 알게 된다.

과학자들은 2050년을 ‘지구 위험 한계’ 마지노선으로 여긴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1도 정도 오른 지구 전체 온도가 그때가 되면 2도 이상 오른다는 이야기, 사람은 물론 생명체 전반이 대혼란을 겪는다는 이야기다. 같은 방식으로 지구가 계속 뜨거워진다면, 2100년엔 지구가 금성처럼 변한다. 현재 금성의 표면 온도는 납을 녹일 만큼 뜨거운 섭씨 500도 안팎이다. 한마디로 금성은 활활 타는 불덩어리다. 해질 무렵 유독 금성이 밝은 빛을 내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이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결코 허구가 아니다!

일차로 자본주의가 지구를 이런 위기로 내몰았으나, 2차로 국가(입법, 사법, 행정)가, 또 3차로 소위 전문가들(학자, 기술자 등)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내모는 데 적극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인 우리 민초들이 아무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지구의 위기에서 최소한 4차 공범 내지 소극적 협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더 이상 ‘노동 속의 자유’ 또는 ‘노동 속의 평등’을 외칠 일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서 자유와 평등을 상상하기 시작해야 한다. 노동 아닌 활동, 파괴 아닌 창조라는 새로운 철학이 우리에게 긴요하다. ‘탈자본’을 위해서라도 ‘탈노동’의 새 관점이 필요하다. 일차로는 윤 정권 같은 수준을 넘어서야 하지만, 이차로는 ‘탈자본’의 새 시대를 열어 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가려면 세상 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관점(심층 생태)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단계씩 천천히 전진하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공부하고 토론하며 ‘아래로부터의’ 지혜 와 힘을 모아 내야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처럼,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같이 가면 즐겁지 아니한가.

강수돌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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