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강수돌]

 

▲ 프리모 레비

“여기서는 ‘왜’라는 질문은 없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기 독일의 나치 치하 강제노동수용소 안에서 통하던 불문율이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이번 겨울에 죽을지 내년 봄을 볼 수 있을지 전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인간성이라고는 손톱 밑의 흙만큼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인간성 말살의 극치를 보여준 강제노동수용소….

그 입구엔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는 구호가 걸려 있었다. 강제 노동이 자유를 준다니,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러나 그런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에 갇힌 사람들이 한 순간이라도 살아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이해하려고 들지 않아야”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감성으로, 영성으로 뭔가를 느끼거나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즉시 극심한 고통과 번뇌로 스스로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도 아는 이는 말하지 말아야 했으며, 모르는 이는 질문하지 말아야 했고, 질문이 있어도 대답하지 말아야 했다. 한마디로, 벌레처럼, 아니, 돌처럼 돼야 살아남을 수 있는, 극단으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프리모 레비(1919~1987)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최종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말한다.

이제 나는 내가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 

▲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살아남은 자의 한 부류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이들”이었다. 즉 그들은 “의미나 가르침 있는 경험”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그 자신도 생존자 중 하나였지만 결국 그는 1987년에 자살을 ‘선택’한다. 그렇게 암담한 세월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고 만들며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없다고 했지만, 이제 우리는 부단히 그 질문을 해야 한다. 과연 어렵게 살아남은 레비는 왜 안타깝게도 자살하고 말았을까?

나는 여기서 삶의 주체성을 엿본다. 비록 그가 극한적 상황에서조차 다른 사람들과 소소한 인정을 나누며 인간성의 마지막 부분을 지켜내긴 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힘겹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실제로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땐 오히려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육신의 고통, 그 내면의 상처, 그 영혼의 망가짐 따위에 대해,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세상의 무심함과 무책임함에 대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한 인간이, 인간성을 뿌리까지 말살하는 너희들에게 죽을 수는 없었기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남고자 했지만, 이제 나는 내가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 그래서 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겠다.” 이것은 한편으로 나치와 같은 반인간적, 반생명적 세력에 대한 경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이후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다시 일상을 반복하는 평범한 세상에 대한 경종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린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는 것에 솔직하게 반응하면서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새벽,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이 자신이 어릴 적 놀았던 고향 마을 뒷산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깡보수 기득권 집단이 참여정부 5년 간 시종일관 괴롭히던 시절에도, 탄핵 정국 속에서도, 꿋꿋이 잘 살아남았던 인간 노무현…. 그런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은 결국 “너희들의 더러운 손에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내 삶을 결정하겠다.”는 주체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프리모 레비와 노무현이 닮은 점이다.

두 사람의 죽음 속에 우리가 배울 것은 ‘진정으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말이 쉽지 과연 실천이 쉬울까? 그러나 차분히 둘러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또 살고 있다. 총칼 앞에서도 비폭력 저항을 하며 꿋꿋이 살았던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고, 끊임없이 낮은 곳에서 낮은 사람들과 함께 부대꼈던 테레사 수녀가 그랬으며, 목숨 건 단식을 통해 천성산을, 이 땅을, 살리겠다고 나선 지율 스님이 그랬다. 이런 분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 하나는,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내 내면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내면의 목소리,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솔직하게 반응하면서 살면 된다. 그것이 바로 본성이고 양심이고 영혼이 아닐까.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땅의 뜻이 아닐까? ‘네이처(nature)’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첫째가 본성이고 둘째가 자연이다. 본성과 자연은 상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때 가장 사람다울 수 있고, 가장 사람다운 본성 자체가 이미 자연의 모습인 것이다.

그 둘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도 각기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됨을 인정하고 존중함을 뜻한다. 모두 각자 주인이 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서로 협동하며 사는 것이다. 나 홀로 주인이 아니라 더불어 주인이 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겸손하고도 조심스럽게 더불어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올바른 주체성을 가진 삶이 아닐까?

바람만이 아는 대답일까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사진/한상봉)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대단히 안타깝고 죄스런 일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 생명을 기꺼이 버릴 정도로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 그 진정성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본다. 텃밭도 돌아본다.

한겨울을 이기고 올라온 온갖 들풀들, 민들레와 아기별꽃, 쑥과 쇠뜨기, 토끼풀과 질경이… 이 모든 생명체들은 인간에 의해 뜯기고 뽑히면서도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호미로 조금만 흙을 파보면 그 속엔 종종 여름을 준비하는 애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뽑힌 풀의 잔뿌리들이 보란 듯이 잘 살아남아 있다. 인간의 도구나 기계, 제초제나 농약 등 화학 약품조차 이 끈질긴 생명력을 완전히 끝장낼 순 없다. 과연 인간도 풀이나 들꽃이 가진 생명력, 삶의 주체성을 있는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부춧돌 형 잿간에 똥을 누고 “똥아, 잘 나와서 정말 고마워.”라고 인사한 뒤 오줌은 오줌대로, 똥은 똥대로 모아 놓는다. 그리고 낫으로 집 주위에 쉼 없이 쑥쑥 솟아오르는 풀들을 툭툭 잘라 닭들에게 던져 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굴을 쏙 내밀고 환하게 핀 장미꽃을 보면서 그 색깔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한다. 주체적 자살을 선택한 프리모 레비나 노무현을 추모하는 듯, 너무나 순수한 붉은 빛이다. 생명의 에너지가 용트림을 한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100만 이상의 추모객들 마음속에 꿈틀대는 그 에너지, 그것이 참된 주체성으로 이어질 날은 언제일까?

두렵기도 하다. 행여 그런 마음들이 곧 사그라질까봐, 또다시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일상의 삶 속에 매몰될까봐….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 내면의 주체성이 억압당하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어른들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그 주체성이 억압당하는 줄도 모른 채 스스로를 억압한다. 아우성을 치되 우리를 억압하는 자의 힘만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계약에 도장을 찍고 또다시 억압적인 상황 안으로 갇힌다. 갇힌 줄도 모른 채…. 그것이 두렵다.

행여 나중에 다시금 갇혔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늘 그렇게 절름발이 삶을 살아온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에 더 익숙해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적인 삶이 어색할 정도로 낯선 건지도 모른다.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과연 얼마나 더 많은 생명체가 스스로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져야 할까? 누구의 노랫말대로 바람만이 아는 대답일까? 왜 그럴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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