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수업 -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너는 마흔네 살에 죽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다. 그러나 네가 천 살을 살았다 해도 나는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이다. 슬픔은 오롯이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고 이 슬픔은 꽤 오랜 시간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상실은 불현듯 찾아오고 우리는 다 나누지 못한 삶의 조각들을 서둘러 찾아보지만 이제 그(그녀)를 다시는 볼수 없다는, 영원히 만져볼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받는다. 

이번 책 "상실 수업"은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와 책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선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타임> 선정 ‘20세기 100대 사상가’, ‘죽음’ 분야 최고 전문가로 인간의 죽음에 관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정신의학자이다.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이 중풍으로 9년간 마비된 몸으로 힘겹게 살면서 수십 년간 연구해 온 ‘죽음’과 ‘남겨짐’에 대한 정신적 실천적 가르침인 "상실 수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비통과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상실 수업",&nbsp;&nbsp;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김소향), 인빅투스, 2014. (표지 제공 = 인빅투스)
"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김소향), 인빅투스, 2014. (표지 제공 = 인빅투스)

그녀는 상실 후 찾아오는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슬픔의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는 우리 마음속의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각 단계별로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큰 상실을 겪게 될 때 보이는 반응을 나타낸 것이지만 전형적인 상실의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듯 전형적인 반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다양하듯 슬픔 역시도 그렇다. 실제로 우리는 큰 상실 앞에 부정과 분노, 절망과 수용, 다시 분노와 타협, 절망과 부정 등의 감정을 수없이 오가며 혼란스러워 한다. 모든 이가 이 다섯 단계를 다 겪거나 정해진 순서대로 겪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에 예상치 못한 상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한다. 상실과 동반되는 슬픔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타인의 것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슬픔과 자신의 슬픔을 비교하거나 누군가의 상실이 자신의 상실보다 더 나아 보인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상실은 다 고통스럽다. 그것은 비교 우위 할 수 없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느끼는 상실이다. 상실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며 상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와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만드는 공허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죽음뿐 아니라 병을 앓고 있는 주체인 우리 자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질병의 의미와 그에 따른 신체적 정신적 상실의 아픔은 오직 자신만이 측정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지난여름 큰 수술을 하고 꽤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 느낀 상실과 고립감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 프랭크는 이렇게 말한다. 

“상실을 충분히 슬퍼하고,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찾으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요. 이런 사람들은 당신이 느끼는 상실을 사소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실과 비교하거나 곧 익숙해질 거라고 말하죠. 많은 것이 당신에게서 사라지고 있을 때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실은 당신 경험의 일부이고, 당신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어요. 질병은 삶의 모든 부분이 상실조차, 경험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슬퍼하는 일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하는 일과도 같아요. 상실감마저 소중히 여길 때 삶 자체를 소중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다시 살기 시작할 거예요.”

애도하는 시간, 비통에 빠진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때때로 눈물을 흘리는 일이지만, 어떤 이는 이것조차 쉽지 않다. 얼마 전 읽은 박완서의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 나오는 주인공 역시 그렇다. 다 키운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독백 소설이다. 마지막에 그녀는 자신의 동창 집에 찾아가 그곳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아들과 그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오열한다. 그간 남의 시선, 체면을 의식하느라 눌러 참았던 울음이 비로소 터져 나온 것이다. “전 그 울음을 통해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러고 나서 요 며칠 동안은 우는 낙으로 살고 있죠.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갈 거 있으면 다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도 안 할 거고요.”

많은 이들이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곧잘 하는 실수는 그들이 너무 오랜 시간 슬픔에 빠져있다고 걱정하는 경우이다. 이는 당사자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자신들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면 더더욱 불안해지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도 빨리 상대방에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이는 아픈 이들에게도 해당한다. 사회는 아픈 사람을 용감하다든지 낙천적이라든지 아니면 명랑하다는 단어로 칭찬한다. 모두가 ‘넌 괜찮을 거야’라는 태도로 병실을 채운다. 하지만 아픈 사람도 애쓴다.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애쓴다. 더는 아픈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상실과 아픔을 겪을 때 온전히 그것을 겪고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주위에서 그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봐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진정한 위로는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길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곁에 가만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책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목이 하나 있다. 병으로 쌍둥이 오빠를 잃은 완다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친구 가일이 한 달이 지난 후, 완다의 집에 갔을 때, 여전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흐느끼고 있는 잠옷 차림의 완다를 보고 매우 충격을 받는다. 가일은 흐트러져 있는 친구에게 말한다. 

“넌 강해져야 해. 오늘은 토요일이야. 쇼핑하러 나가자. 저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어. 한 달이 다 지났잖아. 평일에 일하지도 못하고 주말마다 울 순 없어. 무슨 삶이 이런다니?”

완다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묻는다. 

“쇼핑하러 가는 게 뭐가 그렇게 강한 거야? 가일, 내가 진짜 묻고 싶은 건, 넌 내가 가진 슬픔과 함께 나랑 이곳에 그냥 앉아 있을 만큼 강하기는 한 거니?”

많은 이들이 친구 가일처럼 우리에게 말한다.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또는 그런 친구를 바라보는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쇼핑이나 낚시를 선택하기도 한다. 슬픔에 빠진 누군가와 앉아 있기보다는 무작정 뭔가를 하려고 든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치유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슬픔을 완전히 겪어야 한다. 밖으로 나갈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필자는 지금도 종종 질병을 앓고 난 후 찾아오는 슬픔에 대해 가만히 느껴 본다. 슬픔이 내 곁에 올 때 밀어내지 않고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내 곁에 잠시 앉아 있다 가는 슬픔을 친구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슬픔에 저항하는 것은 오히려 슬픔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큰 질병을 앓고 나서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강해져라, 빨리 이겨내라!와 같은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남모르게 겪었을 상실의 시간을, 그 깊은 어둠의 시간들을 너무나도 알 것 같아서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에서 크고 작은 상실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누군가 지금 내 곁에 그런 시간을 겪고 있다면 그가 자신이 겪을 모든 고통의 터널을 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저 기도할 뿐이다. 격려를 가장한 재촉과 자신의 불안을 투사시키지 않고 상실로 아파하는 이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없이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부디, 그가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게 하지 말자.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중학생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키워드

#구영주 #서평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