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영화를 믿지 않겠지만", 오동진, 썰물과밀물, 2022

이 책은 조금 독특하다.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이상하게 영화보다는 저자가 더 눈여겨보아진다. 더 정확하게는 저자의 사유가 그렇다. 영화가 배경으로 밀려날 만큼 영화를 관통하는 저자의 사유는 깊고 풍부하다.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다정하다. 마치 옆에서 조곤조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그의 편안한 문체 역시 그렇다. 어려운 내용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썼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글쓰기 고수의 숨은 내공이다.

이는 영화라고 하는 장르에 30여 년 넘게 꾸준히 일해 온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 평론가이자, 이번에 네 번째 신간을 낸 오동진 저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일보>와 <연합뉴스>, <YTN>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이후 각종 영화 주간지의 전문 영화 기자 및 편집자로 활동했다. 부산 국제영화제, 제천 국제음악영화제 등등 국내 여러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한국의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들꽃 영화상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는 지난 몇 년간 세 권의 영화 평서를 썼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당신은 영화를 믿지 않겠지만"이라는 책으로 다시 한번 현역으로 활동하는 노장 평론가의 진면목을 보여 줬다. 한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는 우리가 보지 못한 영역으로까지 영화적 시선을 넓혀준다. 그건 다른 말로 저자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경험하고 깨달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그만큼 폭넓고 다양하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그의 책이 그렇다. 읽다 보면 어쩌면 이리도 인간적이고 다양한 측면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나 싶은 작품들이 많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필자는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소박하고 편안한 말투의 문체들, 술술 읽히면서도 젠체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글들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렇다.

"당신은 영화를 믿지 않겠지만", 오동진, 썰물과밀물, 2022. (표지 제공 = 썰물과밀물)<br>
"당신은 영화를 믿지 않겠지만", 오동진, 썰물과밀물, 2022. (표지 제공 = 썰물과밀물)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이 여행 가이드처럼 영화를 소개해 주고 인생을 동반해 주는 그런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무려 63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안내해 준다. 이 정도면 꽤 오랫동안 영화기행을 떠날 만한 분량이다.

이 책은 일단 재미있다. 그리고 각각의 영화를 통한 역사적 배경과 사회 문화적 메시지까지 알기 쉽게 써 놓았다. 이쯤 되면 어디서도 읽어 보지 못한 진귀한 영화 이야기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달콤한 인문학의 세계로 당신이 걸어 들어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개하는 영화마다 독특하면서도 편협하지 않은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이 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다.

다양한 주제 즉, 역사, 정치, 전쟁, 사랑, 가족, 여성, 현대사회와 부조리, 인간의 내면과 그 외로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층적 문제들을 저자 자신만의 냉정하지만, 성찰적 태도로 접근한다.

저자는 사학과 출신답게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그 나라의 문화적 배경에도 해박하다. 영화를 통해 알려주는 역사적 배경과 인물 또는 사건을 연결짓는 지점 또한 흥미롭다. 시대와 시대를 넘나들고 영화와 영화 사이를 넘나들며 문화적 연대를 이룬다. 과히 이야기꾼의 정석처럼 읽다 보면 즐거움에 "아하"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심지어 그는 방대한 지식의 양만큼이나 여러 편의 영화를 나열해서 한 나라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양가위 감독의 영화로 홍콩 반환의 시대사를, 영화 '벨파스트'로 아일랜드 분쟁의 역사를, 올리버 스톤 영화로 미국 현대사가 정리된다.

필자는 여기 나온 63편의 영화를 다 보지는 못했다. 그중에는 안 본 영화들도 꽤 있고 두 번 본 영화들도 있다. 어떤 영화는 이 책의 내용을 먼저 읽고 본 영화도 있지만,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일부러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읽으려는 것도 있다. 내가 느낀 영화의 감상과 평론가인 저자가 언급하는 영화적 장치와 메시지, 사유의 측면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은 단숨에 휘리릭 읽을 수도 없지만, 또 그렇게 읽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낯선 여행지에 갔을 때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재미와 미리 몇 가지 정보를 알고 가는 혼합된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다 본 영화에 대해 또는 아직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는 책이다. 영화마다 함의하는 메시지는 물론이거니와 영화가 만들어진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지식까지 얻어가는 건 또 하나의 덤이다.

저자는 말한다.

“당신이 영화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가 세상을 위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설령 영화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영화 글을 쓸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와 같은 저자의 열정과 결기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의 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세상은 바뀌고 또 변화해 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영화라고 하는 세계와 깊은 사랑에 빠져 마치 자신이 영화 자체가 되어 버린 듯한 평론가의 진심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진심으로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믿음이 그를 살게 하는 듯하다.

영화는 인간의 삶에 다분히 정치적이며 현실적이다. ‘영화 같은 이야기’라는 말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장르같지만 실제로 그것이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때로는 현실을 뛰어넘어 이념과 가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길고 긴 팬데믹을 지나온 우리에게, 지난 몇 년간 우울과 외로움으로 고생한 우리 자신들에게 가벼운 영화관 나들이와 함께 필자가 기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초록으로 더없이 싱싱한 초여름의 문턱에서 이 책을 통해 그대들 삶에 다양한 색채의 사유를 더해 보시길 바란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12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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