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터치의 과학, 수시마 수브라마니안, 동아시아, 2022

존중과 소외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이 책의 저자는 메리 워싱턴 대학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며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고 있는 수시마 수브라마니안(Sushma Subramanian)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별명이 터치-미-낫(touch-me-not)이었을 정도로 신체 접촉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나, 이 책을 집필하며 자신에게도 타인의 손길이 절실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터치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섹슈얼한 이미지부터 떠오르는 게 대다수의 사람일 것이다. 터치는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 터치는 ‘촉각’을 의미한다. 촉각은 인간의 여러 감각 중 가장 본능적이며 직접적인 감각이다. 인간은 태내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손가락을 빠는 행위 즉, 촉각에 의해 자신과 세계를 탐구해 왔다. 이는 인간의 생명 에너지가 가장 활성화되는 감각이다. 동시에 나 자신의 물성과 몸의 실체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느끼게 해 준다. 한마디로 촉각은 우리가 시각이나 청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 깊고 근원적인 영혼의 상태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감각기관이다.

이 책은 살갗에 둘러싸인 육신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해 준다. 터치는 수동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닌, 가치 있고 직관적인 도구다. 그러나 지금의 현대 사회는 이러한 촉각이 거세되고 그 자리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와 같은 수많은 기계와 기술의 세계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느끼는 것’보다 ‘보는 것’을 우선시하는 이른바 시각을 더 우위에 놓았다. ‘존재’ 대신 ‘사고’를 더 우선시하는 그래서 자신이나 타인의 살갗을 만지지 않고 대신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거나 작품을 만들어 시각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그것을 고상한 감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촉각은 세상과의 연결이며 세상을 탐험하는 방식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환경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해 준다. 인간은 관계를 형성하고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단합을 유지하는 데 수시로 터치를 사용한다. 말하기가 취약하고 힘을 잃기 시작할 때 신체 접촉은 의사소통의 중요한 형태가 된다. 우리의 감정은 육체적이며 손은 그것을 표현할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언어는 정보를 직접 전달하기에 뛰어난 발명품이지만 인간 영혼의 깊은 속내를 표현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직 촉각으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촉각, 손의 민감성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큼 중요하다. 뇌와 몸 사이에 피드백 고리가 있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온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없이 가까운 세계와의 포옹-몸과 마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터치의 과학", 수시마 수브라마니안, (조은영), 동아시아, 2022. (이미지 출처 = 동아시아 페이스북)
"한없이 가까운 세계와의 포옹-몸과 마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터치의 과학", 수시마 수브라마니안, (조은영), 동아시아, 2022. (표지 출처 = 동아시아)

우리는 최근 팬데믹을 통과하며 교육 문화 사회 전반의 시스템과 산업들에 새로운 형태로의 전환을 맞이했다. 각종 강의와 수업들은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많은 직장인은 출근 대신 재택근무를 선택했다. 거리 두기의 시행으로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을 피해야 했고 그것을 법으로 규정해 상당히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았다. 서로의 살갗이 닿지 않게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쓰고 서로 손을 잡는 대신 각자의 손에 소독제를 발라야 했다. 포옹과 터치는커녕 재채기라도 하게 되면 눈치를 봐야 하는 삼엄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예전처럼 지나가는 아이에게 예쁘다며 볼을 만지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이제 해서는 안 되는 시대다. 아이의 초등학교 학교 알림장에는 “친구 몸에 손대지 않기”라는 항목이 적혀 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태생적 감각들이 거세된 이후 이제 인간의 친밀함이란 도대체 어디까지의 경계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신체 접촉 부족이 야기하는 우울과 불안, 공감 능력과 면역 기능 저하를 피부 굶주림을 뜻하는 스킨 헝거(skin hunger)라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현대인은 스킨 헝거의 상태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에는 존중과 소외라고 하는 양가적 측면이 있다. 지나친 경계는 소외를 불러오고 친밀감의 증폭이라는 이유로 선을 넘어버린 스킨십은 범죄가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존중이며 어디서부터 소외인 것일까? 타인의 생각과 몸을 존중하는 것과 그 외피만을 강조한 왜곡된(?) 존중 –사실상 그것은 일종의 회피이거나 시스템 속으로의 도피이기도 하다- 또는 잘못된 개념의 존중으로 인해서 되려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이 양립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문화가 시각을 선호한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촉각이 상징하는 육체적 실재가 퇴색한다는 뜻이다. 눈만 뜨면 쏟아져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와 소리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촉각은 자연히 존재감을 잃는다. 한마디로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갖던 터치의 의미는 퇴색되고 인간은 더 진심을 나누지 못하는 구조 속으로 들어가 버린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터치하지 못하는 대신 스마트폰에 터치한다. 스마트폰은 종종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잊게 하고 자신만 바라보게 만드는 중독적 측면이 다분하다. 온종일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려 소통하면서도 진정한 친밀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은 그래서이다. 한마디로 촉각의 상실 시대다.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만지는 것의 충만감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필자는 사람들과 자주 포옹하고 악수하기를 즐겨한다. 농담처럼 인류애의 반영이라 말하지만 그건 서로가 가진 생명력을 나누는 작은 행위와도 같다. 그들과 악수할 때 그들과 포옹할 때 나는 내가 인간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진심 어린 애정이 상대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수많은 체험으로 깨달았다. 의도와 목적성이 없는 순수한 애정의 포옹은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가는 지금 같은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작은 산소와도 같은 소중한 행위다.

인간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손을 잡으며 서로의 온기를 아무런 대가 없이 서로에게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주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의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따라서 터치의 황홀감과 행복감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특권인 셈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가까운 지인들의 손을 무람없이 잡고 포옹해 보자. 우리가 상실한 사랑의 행위들을 기억해 보라. 그저 피와 살을 지닌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의 영적 허기들을 따뜻한 촉각의 인사로 나눠 보자. 때마침 겨울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12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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