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유정란은 안 먹을 거야. 아니,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어."

달걀찜, 찐 달걀, 달걀말이, 달걀국.... 달걀 요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다울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더구나 다른 건 몰라도 찐 달걀만은 우리 집 달걀로 해야 제맛이라며 추켜세우던 다울이가 찐 달걀을 눈앞에 두고 고개를 홱 돌리며 한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먹고 크게 탈이라도 난 적이 있냐고?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사연이 있었다.

그러니까 때는 지난 5월의 어느 날, 우리는 병이리가 태어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암탉 세 마리가 작은 종이상자 속에 쏙 들어가서 알을 품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럼에도 그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이 전부 곯아 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에 의심을 더하다가 마침내 확신에 차서 말했다.

"얘들아, 아무래도 이번엔 병아리를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벌써 한 달도 넘었는데 한 마리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거야. 안타깝지만 상자 안에 든 알 다 꺼내 오고 암탉들도 나오게 하는 게 좋겠어."

"지금 와서 포기하다니 너무 아깝잖아. 암탉들이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아?"(다울)

"됐어. 기다려 줄 만큼 기다렸다구. 네가 사다 먹는 달걀은 비려서 쪄 먹는 거 싫다면서. 이제 그만 품게 하고 새로 알 낳으면 꺼내 먹자. 암탉들도 만날 저러고 있으면 말도 못하게 고생스러울 거야."

결국 다울이도 단념하고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상자 안에 알이 몇 개나 들었는지 몰라도 다울이가 가지고 나오면 고양이들이나 개한테 줘 버리면 되겠다 싶어서 나는 닭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울이가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상자 안에 병아리가 있어.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 앗, 셀 수도 없이 많아!"

헉! 두둥!! 쿵쿵쿵!!! 정말이지 심장이 쿵쿵거리는 순간이었다. 병아리가 벌써 태어나 있었다고? 그것도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믿기지 않아서 얼른 달려가 보니 다울이 말이 사실이었다. 좁은 상자 안에 세 마리 암탉이 꽉 들어차 있어서 그냥 보면 암탉들만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엄마 품에서 쏙쏙 얼굴을 내미는 병아리들이 있었다.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여기서 쏙 나왔다 저기서 쏙 나왔다 하는 통에 몇 마리인지 셀 수는 없지만 하여간 상당히 여러 마리인 것 같았다. 못 해도 열 마리! 많으면 스무 마리쯤? 그야말로 대박, 아니 경사가 난 것이다.

박다울 만화. ©박다울
박다울 만화. ©박다울

상자 높이 때문에 병아리들이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엄마 품에만 박혀 있는 것 같아서 상자 한쪽 면을 찢어 평평하게 해 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병아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디디는 것 같은 가볍고 명랑한 발걸음, 쉴 새 없이 울려퍼지는 천상의 지저귐, 뽀로록 콕콕 땅을 쪼아대기도 하고 엄마 품을 파고들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요술을 부리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멈춰 서서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엔 그저 ‘오지다’는 낱말이 떠오를 뿐이었다.(‘오지다’, 전라도 사투리로 대단하고 굉장하다, 마음이 흡족하고 야무지고 알차다는 뜻.) 아, 이렇게 오지고 오진 마주침이라니!

병아리들과의 마주침이 주는 여운은 대단했다. 평소에는 닭장 쪽에 가는 일이 거의 없는 내가 빨래를 널다가도 밭에 물을 주다가도 문득문득 병아리 생각이 나면 닭장 앞에 가서 기웃거렸다. 병아리 노는 모습을 보고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그렇게 그 작은 생명들의 몸짓과 소리로 내 영혼을 한껏 채우고 나면 살맛이 팍팍 도는 게 느껴졌다. 생명의 약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그게 북소리처럼 잔물결처럼 나에게 무늬를 그려내고 있다는 걸 그냥 쑥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닭장 안을 자주 들여다보다 보니 상자 안에 남아 있는 예닐곱 개의 달걀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암탉들이 이미 태어난 병아리들을 돌보느라 바빠서 남은 알을 품을 여력은 없어 보이는데, 저걸 꺼내 와야 하나? 혹시 더 품을지도 모르니 잠자코 두고 봐야 하나? 이럴까 저럴까 고민이 되어서 마침 집에 와 계시던 친정 엄마에게 말했더니 얼른 가서 바로 꺼내 오신다.

"그대로 두면 곯기밖에 더하겠냐? 귀한 건데 아깝게 버리는 셈이잖아. 혹시 먹을 수 있는 알이 있을 수 있으니 일단 한 번 삶아 봐. 삶아서 이상하면 개나 주면 되지."

엄마의 말에 나는 달걀을 씻기 시작했다. 달걀 껍데기에 닭똥이며 깃털이 잔뜩 묻어 있어서 물을 세게 틀어 놓고 깨끗이 빡빡! 그런데 그 와중에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도 아주 크게, 아주 가까이에서! 혹시나 하고 내 손에 들린 달걀에 귀를 대어 보았더니, 아니 이럴 수가, 바로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다음 이야기는 2편에 이어집니다.^^*)

다나가 그린 우리 집 닭장. ©박다나<br>
다나가 그린 우리 집 닭장. ©박다나
 

정청라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무관심, 무 호기심의 삭막한 땅을 
관심과 호기심의 정원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의 은덕에 기대어서 말이죠.
무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랑한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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