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를 통해 ‘추앙’이라는 단어가 사랑의 진부함을 불식시키는 단어로 떠올랐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붕괴’가 있다. 중국 여성 송서래(탕웨이)는 “여자에 미쳐서 나는 붕괴되었다”는 말을 장해준(박해일)으로부터 듣는 순간, 다른 사랑의 국면으로 들어선다.

지난 5월 선물같이 전해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올드보이’를 넘어 박찬욱의 정점에 오른 작품이라는 평가를 프랑스에서 받았다. 감염병을 이겨내고 ‘영화관 가기’라는 일상을 되돌려 받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영화와 영화관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극장은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헤어질 결심’은 팬데믹 이후 일상의 회복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영화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포스터 제공 = CJ ENM)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포스터 제공 = CJ ENM)

이미 오스카와 칸 그랑프리를 석권해 본 적이 있는 나라로서 칸 감독상은 어딘지 성에 덜 차는 느낌이다. 그러나 유럽 중심주의가 여전한 국제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은 칸 공개 당시 가장 높은 전문가 평점을 받았고, 프랑스 현지에서도 화제 만발이었다. 비록 그랑프리는 불발되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대중적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아직 기회가 있는 세계적인 작가 감독으로서 박찬욱이 위치를 공고히 했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은 볼 가치가 충분하다.

한국영화는 이제 자국 내에서 로컬적으로 머무르는 콘텐츠가 아니다. 한국인 관객을 겨냥하고 있지만 글로벌 차원에서 화제가 되고 소비가 되는 콘텐츠이며, 이러한 흐름에서 탕웨이라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세계적인 스타배우를 한국영화가 충분히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를 만들면서 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파격적인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관객에게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는 파격적인 것이 없다고 선언했다. 더해서 멜로드라마이지만 색과 속의 파격성을 넣지 않음에도 서사적으로 충분히 에로틱하게 만들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영화는 로맨스와 에로스, 오해와 이해, 집착과 불안, 결핍과 의심 등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본능적인 감정들을 서사에 담아 풍성하게 전달한다.

'헤어질 결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CJ ENM)
'헤어질 결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CJ ENM)

영화는 미스터리와 멜로드라마 플롯이 1부와 2부처럼 구분되어 전개된다. 그밖에 수많은 이항 대립의 요소들이 펼쳐지면서 대립적 요소들이 서로를 강화하거나 거울처럼 반사하는 기능을 한다. 서사가 주는 재미뿐만 아니라 영화가 형식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주의적 요소 또한 해석할 거리가 많아서 조금 난해하게 느껴질지언정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는다. 칸 같은 예술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은 어렵고 느리고 지루하다는 편견은 이미 ‘기생충’으로 씻어버렸고, 박찬욱 감독 또한 예술성과 오락성을 잘 조화시키면서 영화를 전개한다.

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자의 변사사건을 맡게 된 담당 형사 해준이 사망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리며 탐문하는 과정에서 신비로운 그녀에게 관심이 커져감을 느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문하는 탐정과 용의선상의 미망인은 할리우드 고전 필름누아르의 오랜 주제다. 여기에 감시하기 위해 몰래 훔쳐보는 행위는 ‘이창’과 같은 히치콕 영화에서 흔히 활용되는 클리셰이고, 금지된 비극적 로맨스는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와 같은 비장미를 더한다. 여주인공이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사랑에 빠지는 순진한 남자 주인공은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차용된 점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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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CJ ENM)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 키드이자 시네필인 점은 널리 알려져 있고, 그는 고전영화의 클리셰를 원용하여 현대영화적으로 훌륭하게 변주한다. 마치 한국어가 서투른 서래가 문어체의 한국어로 정확하게 문장을 말하고, 어려울 때면 번역기의 AI 음성을 빌려 뜻을 전달하는 가운데 감정이 때로는 잘못 전달된다. 번역을 거치면서 원뜻이 의미에서 미끌어져 버리면서 대상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현상과 영화의 형식적 클리셰와 변주는 묘하게 오버랩된다.

산에서 시작하여 바다로 끝나고, 솟아오르는 것과 잠기는 것, 미스터리와 멜로드라마, 형사와 용의자, 한국인과 중국인, 사랑의 시작과 마지막이 안개처럼 서로 뒤엉키는 이항 대립의 혼란스러움이 편집과 촬영의 신묘한 움직임 안에서 표현되다 보니, 이 영화 텍스트를 길게 비평하게 만드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진실로 멋스러운 현대영화다.

‘헤어질 결심’은 파격을 향해 고통스럽게 새로움을 만들어내야 했던 한 예술가가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많은 오마주와 패러디, 인용과 변주 등을 통해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확립하는 여정 한가운데에 있다. 정훈희의 히트곡 ‘안개’가 여러 번 흐르면서 1960년대 문예영화의 걸작 김수용 감독의 ‘안개’를 오마주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린다. 이는 봉준호가 ‘기생충’에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인용했듯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한국영화가 유산과 뿌리를 확실하게 세계에 선포하는 상징적인 지점이다. 한국영화 팬으로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영화는 국뽕이 아니라 진정 예술성을 획득한 21세기 한국영화의 대표작이 될 것이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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