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청춘스타에서 2020년대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슈퍼스타가 된 이정재는 ‘오징어게임’으로 맞게 된 글로벌 관심이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 아님을 이번 연출 데뷔작으로 증명해낼 것 같다. 한마디로 ‘헌트’는 근래 본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올해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면서 이정재는 감독으로 칸 무대에 섰다. 영화에 대해, “인상적인 액션으로 가득하지만 애매한 구성”이라는 칸의 반응을 접하고, ‘헌트’는 아마도 ‘오징어 게임’ 브랜드를 칸이 이용하는 초청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최근에 몇 명의 배우 출신 감독들이 등장했는데, ‘사라진 시간’의 정진영, ‘여배우는 오늘도’의 문소리, ‘미성년’의 김윤석은 상당한 예술성과 주제 의식을 갖춘 영화를 내놓아 필자는 이들이 감독과 배우를 계속해 겸업하기를 바라고 있다. 배우의 연출 데뷔작이 대개 작은 규모의 영화에 한정돼 있던 경향에 반해, 이정재는 성수기를 노리는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로 데뷔했다. 고예산 영화라는 리스크를 가지고 출발한 이 영화를 감상한 뒤, 칸의 반응이 한국 현대사를 알지 못하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단정 지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헌트', 이정재, 2022. (포스터 제공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헌트', 이정재, 2022. (포스터 제공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는 1980년 광주에서 시작해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까지 3년여 동안 펼쳐진 실제 정치적 격변을 다루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해외에도 많이 알려져 있을지라도 이후 전개되는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을 한국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우니, ‘헌트’는 한국인인 우리여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을 빼고 보더라도 대중적인 스파이 액션 영화로서 크게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다. 미남 스타들이 자웅을 겨루며 과감한 액션을 하는 오락적 요소만 가지고도 대중적으로 소구하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스타 배우가 만든 대중적 액션영화라는 틀 안으로 밀어 넣기에는 영화가 환기하는 현대 정치사가 매우 무겁고 이 안에 깃든 휴머니즘 철학이 만만치 않다. 필자는 기꺼이 현대 정치사를 다룬 중요한 한국 영화 중 한편으로 ‘헌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연출, 각본, 주연이라는 막중한 영화의 책무를 세 가지나 맡은 이정재 감독은 연기와 연출을 겸업하며 아카데미 작품상도 받은 할리우드의 벤 애플렉이나 케빈 코스트너 같은 위상을 얻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모래시계’의 말 없던 보디가드에서 시작되었을까.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에서부터 시작해 그가 각본에 녹여낸 현대사의 복잡한 좌우 세력 관계와 정치적 역학이 대가의 터치처럼 다가왔다.

그동안 영화에서 많이 다뤄졌던 5.18민주화운동에서 나아가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북한 군인,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이라는 역사적 팩트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 사건 위에 만들어진 두 캐릭터, 즉 안기부 해외팀 요원과 군인 출신인 국내팀 요원의 스파이 색출이라는 스토리 전개가 서스펜스뿐만 아니라 역사의 아이러니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대통령을 제거하라”는 메인 카피는 두 주인공의 행동 결정의 핵심 키워드로 작동하는데, 누구는 지켜야 하고, 누구는 제거해야 하는 역설들의 충돌, 이 안에서 한국 현대사가 지닌 비극성을 목격하게 된다.

'헌트'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헌트'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헌트”라는 제목이 특징이 없는 평범한 단어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보다 더 정확하게 영화의 컨셉을 표현하는 단어도 없을 것 같다. 작전은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는 것이다. 그럼 사냥꾼이 될 것인가, 사냥감이 될 것인가의 문제다. 공안정국 시기에 우리가 숱하게 보아왔던 간첩 조작 사건의 기시감이 떠오르지만, 남과 북이 공히 첩보전을 펼쳤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고위 관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안기부의 엘리트 요원 해외팀 박평호(이정재)와 광주를 경험한 군인 출신 국내팀 김정도(정우성)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 '동림' 색출 작전을 시작한다. 스파이를 통해 일급 기밀 사항들이 유출돼 위기를 맞게 되자 날 선 대립과 경쟁 속, 해외팀과 국내팀은 상대를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여기에 일본에 머물던 북한 핵물리학자의 망명 사건으로 스파이 동림의 실체가 다가오고,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를 추적하는 입장에 놓인다. 관객은 누가 동림인지 추리하는 가운데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배우 황정민이 분한 이웅평 귀순 사건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영화에 웃을 거리를 남기는 재밌는 에피소드로 기능하고, 이후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영화의 절정부를 이룬다. 이때 거듭되는 반전의 연속은 믿음과 배신의 충돌이라는 고도의 지적 게임을 이끌어낸다. 통쾌함과 비극이 교차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어떤 정의도 선으로만 채워지지 않고, 그 어떤 음모도 악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한국인이라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이렇게도 훌륭하게 대중문화로 생산해내는 힘을 마주하면서 K-영상 콘텐츠가 세계를 호령하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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