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문학동네, 2015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문학동네, 2015. (표지 출처 = 문학동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문학동네, 2015. (표지 출처 = 문학동네)

여기 전쟁에 관한 목소리들이 있다. 전쟁은 언제나 남성의 목소리, 영웅의 목소리만을 외쳤지만 오랜 세월 숨겨져 오고 감추어져 있던 여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만들었다. 일명 목소리 소설(Novel of Voices)로 작가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른다. 다년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모은 이야기를 일반 논픽션의 형식으로 썼지만 소설처럼 읽히는 강력한 매력이 있는 다큐멘터리 산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이다.

이 책은 1985년에 벨라루스와 러시아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하지만 이 책의 원고는 2년 동안 출판사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이 너무 무섭게 묘사되었다는 것, 지나치게 사실적이라는 것, 선도적이고 지도적인 공산당의 역할이 없다는 것. 한마디로 제대로 된 전쟁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도대체 어떤 게 제대로 된 전쟁이란 말인가?’ 게다가 2차 세계 대전 에 참전한 영웅적인 소비에트 여성들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주목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받았다. 즉 전쟁의 이면, 전쟁의 진짜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을 회피하고 장군이나 현명한 총사령관이 나오는 영웅적인 공훈을 이야기하려는 시대의 권력과 갈등을 빚어 왔다.

저자는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 전쟁의 한가운데에 어린 소녀로 참전했던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국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하고 스스로 세뇌되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죽음의 현장으로 걸어 나간 수백 수천 명의 어린 여성 전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 오래 숨죽여 왔던 그녀들의 진짜 목소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녹음하고 기록했다.

사람들은 그간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바꿔치기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누구보다 생생하게 전쟁의 참혹함과 놀라움을 체험한 여성들의 역사는 (진짜 전쟁의 역사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숨죽여 살기를 강요받았고 그녀들 스스로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라며 치를 떨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그녀들은 심장 약을 먹어야 했고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으려 애썼던 봉인된 상처가 모두 해체되며 아우성친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낸 목소리들은 전 세계에서 수백 편의 영화로 연극으로 방송국의 극본으로 재현되었다.

“‘전진! 조국을 위해!’ 자꾸 명령은 떨어지는데 병사들은 자꾸 죽어 나가고 다시 전진 명령, 또다시 병사들은 죽어 나가고. 나는 군모를 벗어서 다른 병사들이 나를 볼 수 있게 했어. 소녀 병사도 이렇게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그러자 다들 다시 힘을 냈고, 우리는 함께 적을 향해 돌진했어....”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생리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여성들이 조국에 충성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도무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끌려 나갔다. 심지어 지원하게 해 달라는, 전쟁에 자신이 당연히 나가야 하는 거라며 가족들의 반대에도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무구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나갔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온몸으로 생생하게 죽음의 시공간을 겪었다. 오직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사상과 이념 하나만으로!

지금의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여러 목소리들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는 종교와 이념과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여전히 그것은 소리 없이 희생된 수백 수천만의 개인의 몸과 피의 값으로 치러지고 있다.

역사는 무엇을 기록하는가! 시대의 영웅이나 한 인물을 훌륭하게 포장한 작위적 서사는 아니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 그리고 그들이 겪은 고통의 조각조각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주 4.3 사건이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들도 떠올랐다. 크고 작은 전쟁 속에서 안타깝게 희생되고 죽어간 혼령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자들의 죽음이 또 다른 전쟁 속에서 떼로 태어나 웅성이는 듯 들렸다.

최근 일어난 미얀마의 쿠데타에 맞서는 시위대의 얼굴들도 떠올랐다. 어린 소녀부터 나이 많은 시민들까지 5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2000여 명이 여전히 체포되어 있는 상태다.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들이 피 흘리고 희생되는 폭력의 온상지인 전쟁은 하루빨리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 수천 번의 총성과 폭격의 공포 속에 죽어간 이름 모를 영혼들의 피 흘린 희생을 기리는 봄밤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12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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