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창비, 2019

아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트에서 과자와 젤리를 고르던 아이는 한참이 지나도 선택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뭐해? 아직도 안 골랐어?” 

“네, 엄마 아직요.” 

아들은 대답하더니 이어 말했다. 

“전 결정 장애에요.” 

“뭐라고?”

“결정 장애라고요. 뭘 잘 결정하지 못하겠어요. 젤리도 종류가 너무 많고 다 먹고 싶은데 한 가지만 고르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순간 조막 만하고 작은 선홍빛 입술에서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 (하지만 당시 꽤나 유행어처럼 돌던 말이었다) '결정 장애'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랍기도 하고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을까 싶은 호기심 어린 마음에 아이가 귀여워서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지음)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저자가 자신이 늘 즐겨 쓰던 ‘결정 장애’라는 말을 어느 토론장에서도 사용했는데 토론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왜 결정 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이는 평소 혐오를 하지 말자는 주장을 하던 저자에게 ‘장애’라는 말이 또 다른 혐오임을 각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이처럼 혐오나 차별의 단어는 우리 일상 안에 너무나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창비, 2019. (표지 제공 = 창비)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유튜브의 각종 채널에서도 이런 식의 단어는 자주 등장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작은 차별의 감각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대개는 자신들이 차별을 하는 가해자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피해자의 입장이다. 

필자가 과거 페미니즘을 공부할 때 했던 고민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의도치 않아도 내가 가진 위치성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차별과 배타를 양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자신의 위치는 그대로여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특권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것이 거대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대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라고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변화란 늘 두려운 것이며 획일화된 하나의 형태만을 고집하려는 기득권은 언제나 존재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발표한 "자유론"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不敬)이니 비도덕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밀의 말대로 우리 삶은 굉장히 획일적인 형태로 굳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계속된 수고를 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불편을 감수할 것인가? 

최근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정치나 페미니즘으로 인한 여성들의 지원 정책들에 대해 차별적 불평등을 제기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왜 그럴까. 지금의 20대는 피부로 느끼는 부모세대 격차의 가장 큰 수혜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다. 현재 20대의 다중 격차는 그들 부모 세대인 586세대의 소득 격차에서 기인한다. 그 전에도 소득 격차는 있었으나 586세대는 산업고도화에 발맞추어 대졸 졸업자의 증가, 대기업 진출, IT산업의 호황 등으로 이전 세대의 소득 격차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지금의 20대는 부모세대의 격차를 그대로 세습 받는다. 

하지만 가부장은 소득격차와 상관없이 아버지라는 계급이 아들에게로 세습되는 유일한 영역이자 자신들에게 '남성'이라는 위치를 견고하게 유지시켜 준 오랜 관습이었다. 과거 심각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진출, 승진, 급여 등등 모든 면에서 극심한 차별이 당연시되었으나 지금의 여성들은 그런 차별에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며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쳐진 것은 없다.) 과거 가정에서 아들의 위치는 아버지의 위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심지어 어머니보다도 아들의 위치가 더 우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극심한 여남 차별도 우리 모두는 당연히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의 세습화로 인해 특히 지금의 20대 여성들은 더 이상 불평등에 그저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20대 남성은 그게 불편하고 불안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이었던 아버지 시대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신보다 똑똑하고 뛰어난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고 자신들의 무력감을 결국 여성혐오로 탈바꿈했다. 

여성 전용주차장이 성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주차장’이 여성에게 갖는 의미, 즉 공포와 두려움인 동시에 실제로 살인과 강간이 일어나는 사회적 범죄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이해나 자각이 없다는 반증이다. 더치페이 논쟁 역시 남녀 사이에 오랫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했고 경제적 부담 역시 불균형하게 분배되어 왔음을 반증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상태에서는 일방적으로 한 집단이 경제적 부담을 질 이유가 없다. 따라서 지금 남성들이 느끼는 이 부당함의 감정은 그동안 존재했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특권을 일깨우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여자는 남성에게 의존성이 강하고 그래서 일에 있어서도 덜 독립적이고 덜 적극적이며 덜 성취적이기 때문에 급여에서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다는 어느 이십대 남성의 의견을 SNS에서 읽었다.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출발선이 다른 체제에 길들여진 전형적인 가부장적 성차별적 발언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성별, 인종, 소수자, 장애인, 난민, 다문화 등등의 차별을 일반적으로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심지어 선량하다고까지 보이는 우리 모두가 사실상 엄격한 의미로의 ‘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다. 저자는 자신의 아찔했던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만연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인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한다. 

차별을 둘러싼 긴장들은 ‘내가 차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망 혹은 희망을 깔고 있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당신은 지금 누구를 차별하고 있나요?” 

필자의 질문이 당혹스러운가?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11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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