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지나고 내린 깜짝 눈 선물에 다울이가 만든 눈사람. ©️정청라
설 지나고 내린 깜짝 눈 선물에 다울이가 만든 눈사람. ©️정청라

저녁을 먹고 난 이후 한두 시간은 우리 집 세 아이가 가장 업(!) 되는 시간이다. 놀라울 정도로 셋이 한마음이 되어 신나게 까분다. 고래고래 노래 부르기, 정신이 나간 듯이 춤추기, 즉석 연극 공연, 베개 싸움, 누가누가 가장 우스꽝스러울까 패션쇼.... 이 시간대엔 폭소를 유발하는 호르몬이라도 흐르는 건지 별것 아닌 일로도 온몸으로 웃어 대고, 서로를 웃기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호들갑스러운 몸짓과 소리를 내면서 보는 사람이 질색하도록 놀고 또 논다. 하지만 나에게는 상기된 아이들을 제압할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자, 계속 까불면 책 안 읽어 준다. 이제 그만 놀고, 읽고 싶은 책 골라 와!" 바로 이 한마디다.

내가 그 말을 딱 내뱉는 순간, 갑자기 공기부터가 달라진다.

"꺅! 드디어 엄마가 책 읽어 준대."

"오빠, 내 책 어디 있어? 내 책 좀 찾아 줘."

현실을 잊은 듯이 무아지경으로 놀던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어질러진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편다. 그런 뒤에 각자가 좋아하는 책을 한 권씩 집어 들고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다울이는 아랫목 명당 자리에 앉아 혼자서 책을 펼쳐 들고, 다랑이는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내 옆자리에 꼭 달라붙어 앉고, 다나는 내 앞자리 일등석을 떡 하니 차지한 채로 책을 펼쳐 들고.... 사실 네 책 내 책이 거의 나뉘지 않는다. 대개는 먼저 책을 읽은 다울이가 추천해 준 책이 다랑이 책이 되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 가운데 특별히 사랑받은 책이 다나 책이 되는 식이다. (그리고 때로 어느 한 책에 깊이 몰입해 있는 경우 그 책의 두 꼭지를 연달아 읽어 주는 것으로 결정하기도 한다.)

"호비트"를 만난 뒤로 활쏘기의 매력에 빠져버린 다랑이. ©️정청라
"호비트"를 만난 뒤로 활쏘기의 매력에 빠져버린 다랑이. ©️정청라

가장 최근에 아이들 혼을 쏙 빼놓은 책은 "호비트"다. 처음에 다울이가 이 책을 적극 추천하며 한 꼭지를 읽어 주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지못해 듣는 기색이 역력했던 다랑이와 다나는 이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표정이 되었다. 빌보라는 호비트와 13명의 난쟁이, 그리고 마법사 간달프가 함께하는 모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주는 나는 물론이고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다랑이와 다나, 심지어 다른 책을 읽는 와중에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다울이까지, 우리는 책 속 주인공들과 한 몸이 되어 책장 속을 한 걸음씩 내딛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고블린이라고 하는 괴물 같은 녀석들의 추격을 따돌리느라 애가 타기도 하고, 두려운숲을 헤매느라 곧 쓰러질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이 모험이 언제 끝날까 끝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용의 소굴에서 흘러나오는 고약한 냄새가 진짜로 곁에서 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책 속 세계에 몸과 마음을 쏘옥 빼앗기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읽고 있던 이야기의 한 꼭지가 끝나 버렸을 때 우리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빌보가 혼자 몸으로 엘프 동굴의 지하 감옥에 갇힌 13명 난쟁이들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용이 무서운 불길을 내뿜으며 호수도시를 홀랑 태워 버리려 하는 대목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그 다음에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안달이 나는 지경이 된다. 궁금증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날 밤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그뿐 아니라 불 끄고 자려고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도 끝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상상들....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온갖 생각들이 파도처럼 철썩철썩 밀려든다.

 

"빌보는 얼마만큼 작을까? 용은 얼마만큼 크지?"

"용은 왜 그렇게 보물을 좋아할까? 그냥 쌓아 두기만 할 거면서...."

"소린도 욕심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자기가 죽을 줄 알았더라도 그렇게 욕심을 부렸을까?"

"원래 보물이라는 게 사람을 홀린다잖아. 자기 몫의 보물을 선뜻 줘 버리는 빌보가 대단한 거야."

"그래도 나는 소린이 멋있더라. 갑자기 죽었단 소리를 듣고 눈물이 나올 뻔했어."

"필리와 킬리도 소린을 지켜 주려다 죽었다잖아. 난쟁이가 세 명이나 죽다니 너무 슬퍼."

"어쨌든 빌보는 대단한 모험을 했어. 처음에는 겁쟁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용감해지다니...."

"모험을 하다 보면 용감해지는 걸까? 아님 처음부터 용감했는데 자기도 몰랐을까?"

자, 그쯤 되면 안녕 노래를 부를 시간이다. 지금껏 우리를 모험의 세계로 이끌어 준 책 속 주인공들에게도, 우리들의 밤을 지켜 주는 별님과 달님에게도 안녕을 고하고 꿈나라로 가야 하는 시간! 이상하게도 안녕 노래를 부르면 하품이 나오며 잠이 쏟아진다. 그렇게 우리는 꿈속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한 이불 덮고 잠자리에 드는 다섯 식구의 모습. ©️박다나<br>
한 이불 덮고 잠자리에 드는 다섯 식구의 모습. ©️박다나

 

안녕 노래(글,곡 / 정청라)

 

별님 안녕 달님 안녕

우리는 이제 자러 갈 거에요

별님 안녕 달님 안녕

내일 또 만나요

 

덧.

이 노래는 다나가 세 살 되던 해 여름에 만들어졌다.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방으로 자러 가면서 잠시 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내 등에 업혀 별님과 달님에게 잘자라고 인사를 건네던 다나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해 온 것이다. "엄마, 별님 안녕 달님 안녕 노래 불러 줘"라고. 나는 호비트에 나오는 엘프들처럼 즉석에서 이 노래를 만들어 불러 주었고 그 이후로 쭉, 잠들기 전 부르는 안녕 노래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쩌면 엘프족의 후예인 것이 아닐까? ^^;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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