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제법 길어졌음에도 하루가 무척 짧게 느껴진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지 놀기 좋아하는 우리집 아이들,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면 소란스럽게 부엌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벌써 밤이라니!“(다랑)

“맞아,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지?“(다나)

“재밌게 놀 때는 시간이 더 빨리 간다니까.“(다랑)

“맞아, 왜 그럴까?“(다나)

손발이 척척 맞는 짝꿍처럼 다랑이가 선창을 하면 다나는 후창을 하고, 두 아이는 차려 놓은 저녁 밥상 앞에서 슬금슬금 반찬을 집어 먹느라 바쁘다. 근데 다울이가 너무 조용하다. 다울이는 어디 간 거지? 이쯤 되었을 때 짠 하고 나타나 씻지도 않은 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는 동생들을 질타하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다다다 보고를 할 때가 되었는데?

“엄마, 다울이 형아는 어디 간 줄 알아? 갑자기 순딩이가 없어진 거 같다면서 밭으로 갔어.“

순딩이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키우는 산양이다. 지난해 6월부터 식구가 되었는데 다울이가 순딩이 담당 보좌관 역할을 맡고 있다. 조금 멋지게 표현해서 담당 보좌관이지, 노골적으로 말하면 순딩이 시종관이다. 순딩이님 먹이 챙겨 주기(또는 먹음직스러운 풀밭으로 인도하기), 목줄이 꼬여 행여 귀하신 몸께서 불편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기, 물그릇에 똥을 싸 놓기 일쑤인 순딩이님에게 다시 깨끗한 물 대령하기, 침대보를 갈아 주듯 포대 가득 주운 낙엽 더미를 순딩이님 안식처에 깔아 주기 등 시종관이 맡게 되는 임무는 엄청나다. 다울이는 때론 씩씩거리며 때론 투덜거리며 때론 담담하게 가끔은 신이 나서 이 일을 하고 있는데 밤이 될 무렵에 순딩이를 보러 밭에 간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딩이의 안부를 물으러 가다니!!!

다울이가 그린 순딩이. ©️정청라
다울이가 그린 순딩이. ©️정청라

나는 사실 맥락을 알고 있었다. 오후에 순돌이밭에 갔을 때 마침 우리 밭 옆에서 길 보수 공사를 하고 계시던 낯선 아저씨가 다울이에게 이런 얘길 하시는 걸 들었던 것이다.

"야, 이 염소 느그 거냐? 아자씨가 델꼬 가 블라는디 그래도 되제? 이따 염소 안 보이믄 내가 델꼬 간 줄 알아라이."

물론 아저씨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울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는 집에 돌아올 시간에 밭으로 뛰어 올라간 것이다. 아저씨가 순딩이를 정말 데려갔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한참이 지난 뒤에 다울이가 돌아왔다. 그런데 무척 다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엄마, 빨리!"를 외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람?

"엄마, 내가 순딩이 잘 있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노래 하나가 떠올랐어.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녹음해야 돼! 빨리 녹음!!!"

다울이의 재촉에 나는 밥그릇에 밥을 담다 말고 달려갔다. 그리곤 얼른 컴퓨터의 녹음 버튼을 눌러 주었고 다울이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우리 순딩이는

우리 순딩이는

언제나 예쁘지요

 

참 단순하고도 간단한 노래인데 노래를 듣는 입장에선 그렇게 간단하게 들을 수 없는 노래였다. 왜냐, 순딩이 '때문에'와 '덕분에'를 오가며 우리가 마주쳤던 숱한 이야기, 냄새, 소리들을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저녁의 사건만 들여다보더라도 순딩이를 낯선 아저씨가 데려갔으면 어쩌나 초조해 하며 있는 힘껏 밭으로 달려갔을 다울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순딩이의 얼굴을 찾아낸 순간 느꼈을 환한 안도감도 보인다. 얼마나 예뻐 보였을까? 얼마나 예뻤으면 그 순간 노래까지 솟아올랐을까....

 

'산양 젖을 먹고 싶다! 그것으로 치즈와 요거트도 만들어야지!' 그런 마음으로 키우게 된 순딩이다. 하지만 산양을 오래 키워 본 친구에게 순딩이는 체형상(혈통상) 젖을 그렇게 많이 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실망했던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환상에 허우적거리던 우리에게 순딩이의 넘치는 식욕과 배고플 때 드러나는 성질머리,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똥더미는 얼마나 큰 좌절을 안겨 주었나. (지난해 여름, 다울이와 둘이서 이를 갈며 산양 우리의 똥더미를 치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에 괴로워하며 다울이는 순딩이를 고깃감으로 팔아 버리자며 울부짖었고, 나는 내가 왜 순딩이를 키우자고 했을까 후회막급하여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묻고 또 묻게 되었다. 순딩이의 쓸모에 대하여.... 먹고 싸는 일이 전부인 한 존재에 대하여.... 그러다 보니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었고 마침내 순딩이는 존재 자체로 기쁨이고 예쁨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오늘의 이 노래로 그것을 증명하게 된 셈이랄까?

순딩이는 언제나 예쁘고, 앞으로도 예쁠 것이다. 순딩이 만만세!

다울이판 노래 이야기. ©️정청라
다울이판 노래 이야기. ©️정청라

덧. '우리 가족이 발견한 순딩이의 쓸모'

하나. 그림을 그리는 데 영감을 준다.(다울, 다랑, 다나)

둘. 손이 시려울 때 순딩이를 만지면 손이 따뜻해진다. 때론 젖은 손을 말려 주는 수건 역할도 한다.(다울)

셋. 먹는 풀, 못 먹는 풀을 가르쳐 주고, 풀을 먹어 보고 싶게 만든다.(다랑)

넷. 비밀을 털어 놓으면 다 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절대 누설하지 않는다.(다울)

다섯. 예초기가 따로 없다.(다울 아빠)

여섯. 똥거름 제조용으로 훌륭하다.(다울 아빠)

일곱. 순딩이가 풀 뜯어 먹는 것만 지켜봐도 절로 명상이 된다. (엄마)

(계속 발견 중이니 업데이트 요망! ^^)

순딩이를 그리는 다울이와 다랑, 다나. ©️정청라
순딩이를 그리는 다울이와 다랑, 다나. ©️정청라
다랑이가 그린 순딩이. ©️정청라
다랑이가 그린 순딩이. ©️정청라
순딩이 그림들. ©️정청라
순딩이 그림들. ©️정청라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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