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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야 고마워[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30]

떡을 내놓지 못했던 날들에 대한 반성

거의 3개월 만에 원고를 쓰려고 앉았다. 어린 아기를 키우며 잠이 모자랄 때도, 손가락이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에도, 거센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는 변을 겪고도 꿋꿋하게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웬일? 지난 원고를 올리던 무렵 아니카와 삐삐가 차례로 새끼를 낳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날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게다가 산양 식구 순딩이가 들어오면서 부쩍 더 바빠지지 않았냐고 나름 핑계를 끌어와 보지만 글쎄올시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가 나를 속일 수는 없는 법.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내 생명력을 깔고 앉은 채로 불통의 상황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코로나라고 하는 현실적 상황이 안 그래도 ‘고립’을 욕망하는 나의 성향에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어렸을 때 별명이 '방안퉁수'였을 정도로 집콕을 사랑했는데 커 가면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느껴 어떻게든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집을 떠나야 내가 산다!) 글쓰기도 고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려는 절실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만남과 공부의 장을 의식적으로 열어 가려고 온갖 노력을 해 오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코로나라는 상황을 맞딱뜨리자 그동안 원수 취급을 받던 고립 욕망이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때다 하고 문을 쾅 닫고 들어앉아 마음껏 숨어 있었던 것. 정신줄 놓고 꾸벅꾸벅 조는 상태로 고립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 깨어나야지 깨어나야지 하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는 꿈속을 헤매이는 것과도 같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노래가 샘솟겠나. 날이 갈수록 노래 샘이 쫄쫄 말라가는 게 느껴졌고, 더불어 아이들 앞에서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는 나를 자주 보게 되었으며, (원고를 쓰려고 들지도 않으면서) 원고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속으로 끙끙 괴로워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정신 차려!'라고 매섭게 말해 줄 법한 유튜브 강의를 찾아 듣기도 하고, 죽비 같은 책을 여럿 곁에 두고 펼쳐 보기도 했지만 그게 생각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을 땐 ‘아하’ 하고 무릎을 치며 깨달은 것 같은데 어떤 상황에 휘말리면 도로아미타불, 나는 또다시 화를 내며 입에서 불이 나오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화를 내는 건 아이들이 나를 화를 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자기합리화에 도취된 채로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상황 하나.

순돌이밭을 지키고 있는 복실이에게 밥을 주러 간다. 나는 밥그릇을 들고 다울이는 물주전자를 들고. 그런데 복실이 앞에 도착하자마다 나는 개밥그릇에 전날 준 밥이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보게 된다.(거기 담긴 밥은 이미 상해서 못 먹게 된 상태) 먹성 좋은 복실이가 자체 단식을 했을 리는 없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니 밥그릇이 목줄에 묶인 복실이가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놓여 있다. 순간, 전날 밥을 가져가 주었던 다울이를 째려보며 나는 매섭게 말한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밥을 주려면 제대로 줘야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엄마, 나는 분명히 복실이 닿는 곳에 줬어."

"그럼 밥 그릇이 저절로 움직여서 달아난다는 거야? 잘못했으면 순순히 인정하고 뉘우쳐야지 어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려고 들어?"

다울이가 으앙 울어버릴 때까지 나의 잔소리는 그치질 않는다.

: 아이를 울려 놓고 생각해 보니 다울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실이가 밥그릇으로 달려들다가 그릇을 밀어버렸을 수도 있지 않나. 만약 다울이가 실수로 밥그릇을 멀리 두었다 하더라도 그걸 꼭 나쁘게만 바라보아야 할까? 하루 단식으로 복실이가 더 건강해진지도 모르지 않나.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어 다울이를 꼭 안아주고 사과를 한다. 병 주고 약 주기.

울금(강황)꽃. 어지간해선 꽃을 보기 힘든 작물인데 올해 한 포기 꽃이 피었다. 우연히 떨어진 씨앗에서 자란 외돌토기 울금에서. ©정청라

상황 둘.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솎아 온 열무를 다듬었다. 시든 부분은 시든 부분대로 닭밥 주려고 따로 모으고 싱싱한 이파리는 다른 그릇에 모으고.... 그런 다음 방에 들어가 잠깐 쉬면서 다랑이에게 닭밥을 주고 오라 시켰다. 다랑이가 방문 앞에서 "엄마 이거?" 하면서 그릇을 들어 보였는데 대충 보고 "응, 그거." 하고 말했다. 그런데 부엌에 나가 열무를 데치려고 보니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알고 보니 싱싱한 열무가 담긴 그릇을 다랑이가 닭밥인 줄 알고 들고 나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다듬은 건데 그걸 닭한테 주다니' 싶어서 나는 닭밥을 주고 돌아오는 다랑이에게 잔소리 세례를 퍼붓는다. "얼른 가서 닭장에 뿌린 열무 주어 와!"라는 망발까지 하면서 말이다.

: 다랑이가 분명 자기가 들고 있는 게 닭밥이 맞는지 물었다. 그때 내가 자세히 보고 살폈더라면 애써 다듬어 놓은 열무를 닭한테 주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잘못에는 주목하지 않고 내가 얼마나 애를 써서 열무를 다듬었고, 그것으로 시래기국을 끓이려 했던 내 계획이 어긋난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이의 잘못을 꾸짖기 전에 내 잘못부터 직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또 뒤늦게 뉘우치고 슬그머니 사과했다. 다랑이는 뒤끝이 제법 긴 아이인데 언젠가 닥쳐올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상황 셋.

다나가 자기가 노래를 만들었다면서 들려준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꽃처럼 예뻐요. 별처럼 예뻐요. 물처럼 예뻐요. 그런데 화를 많이 내요.” 행복감에 젖어 노래를 듣고 있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찬물 세례를 받은 듯 정신이 번쩍 나서 다나한테 묻는다.

“엄마가 화를 많이 내니?“

“응, 엄마가 요즘 화를 많이 내잖아. 엄마는 몰랐어?“

: 화를 많이 냈으면서 화를 많이 낸다는 소리를 들으니 새삼스럽게 뜨끔한 심리는 뭘까? 화를 많이 내면서도 화를 안 내는 착한 엄마라는 간언을 듣고 싶었던 건가? 충직한 아이의 직언 덕분에 정신을 차린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부끄럽지만 위와 같은 일들이 그동안 꽤나 많았고, 그러한 일련의 사건과 뉘우침을 통해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나처럼 성질 고약하고 편협한 인간이 가야 할 숙명과도 같은 길은 노래와 글쓰기라는 것을. 노래가 내 뾰족뾰족 거친 마음을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게 해준다면, 글쓰기는 완고한 나 중심성을 벗어나게 해준다. 그 두 가지 바탕 위에서 그나마 내가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엄마다운 엄마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을 망각하거나 방심해서 날뛴다면 야수가 아이를 키우는 꼴이 되는 것!

아마 다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보면 호랑이가 떡 대신 엄마를 잡아 먹고 나서 엄마 시늉을 한 채 아이들을 찾아간다. 굵고 거친 목소리, 뾰족한 발톱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남 얘기 같지가 않다. 어쩌면 나도 엄마를 집어삼킨 호랑이 꼴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래와 글쓰기는 내가 가진 떡? 떡이 떨어지면 나는 호랑이가 되는 거?ㅎㅎ) 부디 노래와 글쓰기가 나의 야수성을 잠재워 주기를,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 엄마인 채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기를,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희망을 품어 본다.

지난 여름 내 뜨겁게 웃어주던 해바라기. ©정청라

덧.

내가 주저앉아 있는 동안 다울이가 만든 노래를 띄운다. 나를 화나게도 하지만 결국은 웃게 하고야 마는 해바라기꽃 같은 아이들! 아이들 덕분에 나의 부끄러움을 돌아보고 비틀거리면서도 수행의 길을 걷는다. 아이들 덕분에 사는 날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덕분에 사는 오늘이 참말 고맙다.

 

해바라기야 고마워

 

해바라기꽃이 피었어요.

나를 보며 방긋 웃네요.

나도 따라 저절로 웃게 돼요.

해바라기야 고마워.

 

수년 동안 검불 추려내거나 볏짚 집어 주는 보조만 하다가 올해 처음 호롱기로 탈곡해 보는 다울이의 흥겨운 수확의 풍경. ©정청라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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