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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처음엔[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31]

올 고구마 농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내 농사다. 밭 만들기부터 시작해서 모종 기르기, 풀 매기, 바닷물 뿌려 주기, 이랑 덮어 주기.... 다 혼자 해냈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고구마를 캐고 있는데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게 재미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직 캐지 않은 고구마 이랑을 보면 (내가 캘 것도 아니면서) 심란해서 한숨만 푹푹 나왔던 것 같은데 올해는 설레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이다!)  뜨근한 방바닥에 좀더 누워 있고 싶어지는 쌀쌀한 아침에도 '오늘은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하고 떠올리면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나질 정도다.

그런데 이 재밌는 놀이를 안타깝게도 아직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다울이와 다랑이. 고구마 캐자니까 처음에는 신난다고 달려들더니 한 고랑 캐고는 단감나무 위로 줄행랑을 친다. 거기에서 고양이들 트리하우스를 짓는다고 난리, 트리하우스에 들어간 고양이들 사진을 찍는다고 블루스.... 뭐가 그렇게 즐겁고 웃긴지 지들끼리 히히덕거리느라 바쁠 뿐, 나무에서 내려와 일손을 보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야옹이 트리하우스. ©정청라
트리하우스 안의 고양이들. ©정청라

 

하지만 다나는 다르다. 오빠들의 난리블루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와 함께 고구마를 캔다.

"엄마, 내 이마 한번 만져 봐. 땀 송송 나지?"

"야, 너 너무 힘든 거 아니야? 쉬엄쉬엄 하지 그래."

"안 힘들고 재미있는데? 나처럼 고구마 잘 캐는 꼬마는 처음 봤을 걸?"

"그렇구마. 이런 꼬마가 있을 줄은 몰랐구마."

"엄마 왜 자꾸 사투리말 해?"

"고구마 캘 땐 원래 구마로 끝나는 말만 해야 하는구마."

"그래? 알았데이."

"데이가 아니고 구마라니구마!!!"

이렇게 시시껄렁한 말장난을 해가며 지극정성으로 고구마를 캔다. 땅속에 박힌 보물을 캐는 것마냥, 시간을 거슬러 고대의 유물을 밝혀내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하고, 그러다가 고구마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순간 반가워서 꺄악 소리치고, 탐스러운 고구마를 호미로 찍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고구마를 갉아먹은 두더지 이빨 자국이라도 발견하면 ‘미안하구마‘, ‘아깝구마‘ 탄식의 말을 내뱉는다. 그렇게 해서 캐어 낸 고구마는 잔뿌리 같은 걸 끊어 내어 단정하게 손질하고, (장기보관용, 일찍 먹을용, 개밥용으로) 분류 선별 작업을 하고, 서로 포개어지지 않게 졸졸이 눕혀 볕에 말린다.

아, 이 얼마나 전심을 다하는 일목요연한 작업인가! 이것은 어쩌면 그냥 작업이 아니고 성스러운 예술 아닌가? 하지만 함정이 하나 있으니 작업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 다울 아빠가 캤으면 하루 이틀 사이 끝냈을 일은 나는 며칠째 천천히 이어가고 있다.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고구마들. ©정청라
방금 목욕을 마친 고구마들.(품종은 이삐다고 이빼) ©정청라

 

사실 들깨 터는 일도 그랬다. 나는 아주 꼼꼼하고 정성 어린 태도로 들깨를 털었다. 들깨 향기에 취하고 막대를 두드릴 때마다 들깨가 쏟아져 나오며 내는 경쾌한 소리에 반하여, 하루종일 들깻대를 두드린다 해도 몸이 고단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런데 그때 다울 아빠가 나타나서 말!

"뭐에요? 아직도 이것밖에 못 털었어요? 내가 깝깝해서 정말...."

그러고는 내가 이틀 동안 털었던 들깨의 5배도 더 될 만큼의 양을 반나절도 안 되어 해치워 버렸다. 할 일이 들깨 터는 일만 있다면 모를까 콩 타작, 팥 타작, 겨울 작물 심기.... 첩첩산중의 일감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고, 게다가 요즘 반나절 알바까지 하고 있어 일할 시간이 모자라니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워낙에 손이 빠르고 일머리가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다른 일이야 있건 말건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내 꼴을 보는 게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지 알 만하다. 나도 아이들한테 뭘 시켜 놓곤 속이 터지는 심정을 겪어 봐서 안다. (예를 들어 조심해서 들고 가라며 개 밥그릇을 건네 주었는데 보기 좋게 길바닥에 엎어버렸다든가, 고구마를 캔다면서 호미로 다 찍어 놓기만 한다든가, 김을 좀 구우랬더니 홀랑 태워 버렸을 뿐 아니라 불까지 낼 뻔했을 때....) 그럴 때면 ‘앓느니 죽지’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며 잔소리를 해대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돌직구를 던지듯이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어렸을 때 나처럼 실수한 적 없었어?"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잘했어?"

참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 질문이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고 퉁 치며 지나가지만 속으로는 뜨끔해지는, 그래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잔소리 불길이 확 꺼지게 만드는 불 앞에 물 같은 질문! 나도 한 번 갑갑해 하는 다울 아빠에게 비슷한 질문을 해 볼까나? 아니, (맥락에 딱 맞아떨어지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노래로 은근슬쩍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

날이 추워지면 댓돌 위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들. ©정청라

 

모두들 처음엔 (동시 : 이안)

 

대추나무도 처음엔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꽃도 시원찮고 열매도 볼 게 없었다.

 

암탉도 처음엔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횃대에도 못 오르고 알도 작게만 낳았다.

 

모두들 처음엔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조금씩 시원찮고 조금씩 서투르지만

 

어느새 대추나무는 내 키보다 키가 크고

암탉은 일곱 식구 거느린 힘센 어미 닭이 되었다

 

덧 : "하사엄니 화전가"란 책을 읽다 보니 이 시가 전해 주는 메시지가 구례 사는 어느 할머니 목소리에도 담겨 있다. ‘처음에는 잘하는 사람 없어 베려 불제. 버려 가꼬 또 허고 또 허고 뭣이든지. 반죽도 많이 하면 다음엔 째끔만 해야겄다 느낌 오잖여. 다 그래 가꼬 배워.‘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죽을 때까지) 배우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뭣이든지 실수 없이 최고로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배움 자체를 즐기는 오늘이 되길!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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