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7월 19일(농민 주일) 지혜 12,13.16-19; 로마 8,26-27; 마태 13,24-43

대지의 주체는 농민이 아니었다. 그들이 흙에 입을 맞추고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며 살아왔다 한들 주체는 늘 약탈자들의 몫이었다. 유사 이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누구든 자기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없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자본을 가진 자가 주체다. 그래서 소작인이든 무산자든 대상으로서 소외된 삶은 단 한 번도 바뀌어 본 일이 없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본의 머슴이다. 그래서 머슴인 자는 이후 스스로의 삶에 주인이 되기 위해 농촌 대탈주를 감행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 이후 ‘농사나 짓겠다’거나 ‘농사나 지어라’와 같은 말은 모욕적인 언사로 취급되었다. 당시의 낙향은 오늘의 귀농이나 귀촌 같은 말과는 격이 달랐다. 이후 환금성을 잃은 대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더니, 오랜 세월 비루한 대지로 연명하더니, 어느새 조금씩 투기자들의 손에 팔려나갔다. 대지가 팔려나갔다는 소리는 대지의 사람들도 함께 팔려나갔다는 소리다. 그러니 농촌에 대한 섣부른 낭만은 금물이다. 농촌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는 상투적인 말도 금물이다. 여전히 농촌은 차별적이고 논쟁적이니 말이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도시에 밀집해 있고, 도시는 지금도 팽창 중이다. 이 땅은 사막화가 아니면 도시화로 혹은 자본의 땅으로 점령된 지 오래다. 이 딜레마가 언제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대지를 잃는 것이 미래를 잃는 것이라면서도 기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농식품이 자본에 포섭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미국과 국제기구의 비호 아래 세계 농식품 체계가 형성되면서 농업과 먹거리에 대한 지배가 점차 심화되어 갔다. 초국적 농산업 복합체, WTO, FTA, TPP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농촌과 먹거리의 존엄성 파괴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남아 돌아가는 농산물이 밀려 들어오면서 기존의 농업구조를 뒤흔들었다. 그러니 실상 문제는 농촌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다.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은 농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은 도시민도 제 돈을 가지고도 정당한 소비 주체가 되고 있지 못하다. 농민들은 어느 때부턴가 시장에 맹목적으로 포섭되어 갔고, 소비자들은 마트의 원스탑 쇼핑을 통해 '주는 대로 먹는' 문화에 길들어졌다. 그 사이에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본시장이다. 경작하는 농민에 대해 불합리한 착취 구조를 생산하고, 안전하지 못한 먹거리를 가공해 시장에 공급하는 주체는 대개가 거대 자본들이다. 이제 농사를 둘러싼 농민들의 노동이나 도시민의 노동을 통해 사들이는 농산품 구조는 모두 자본시장이 쥐고 있다. 

현실이 이런데도 도시의 소비자들은 편리함과 무관심 속에서 이런 부당거래를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알아챘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자본의 손에 사회와 농촌, 안전한 식탁과 아이들의 미래를 내맡겨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밀밭. (이미지 출처 = Pixabay)

팬데믹이 세계화의 질주에 제동을 걸고 나섰지만 잃어버린 대지와 농산업 구조가 본래의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본적 인간으로 개조된 현대인들이 생태적 인간으로 돌아서기란 또 그 얼마나 요원한 일이겠는가. 천지가 어둠이고 사방이 그림자다. 마스크 없는 일상을 되찾아 오기도 여력이 없는데, 뉴스의 중심축은 연일 경제성장 마이너스 지표에 멈추어 섰다. 이런 와중에도 발 빠른 자본시장은 팬데믹과 공존할 새로운 해법에 몰두해 있고, 거대 팬데믹은 질병이든 빈곤이든 자기 방어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다. 

개발과 성장에 광분했던 인류가 이런 식으로 파국을 맞이하게 될 줄 누가 상상했을까? 몹쓸 짓을 한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이런 세상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아이들과 미래의 세대들에게 낯을 들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은 가까운 미래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 당장 이번 가을에 들이닥칠 제2의 대유행이 걱정이다.

오늘 독서는 이런 엄혹한 시기,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 무력한 인류에게 새로운 힘을 선사한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한 점 의혹 없이 절대 신뢰를 보이는 지혜서 저자의 믿음은 뿌리 없이 흔들리는 우리에게 구원처럼 든든하다. 이런 때는 땅을 치는 절망의 시기라 해도 순순히 태산 같은 그의 믿음에 기대 볼 일이다: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당신은 불의한 심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참조: 지혜12,13-18) 그래서 저자는 이 불의한 상황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버텨낸다. 그가 믿는 신은 정의로운 신이며, 그 신이 권능을 행사하는 경우는 오직 하나, 만물을 돌보고 소중히 여기는 통솔자로서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힘은 다시 살리고 회복시키는 희망의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를 압도하는 이교도의 신 앞에 속수무책 접질러진 우리 두 무릎을 벌떡 일으켜 세울 유일한 신인 것이다.

세상 끝까지 지속될 회개와 희망의 가능성은 예수에게서 더 분명해진다. 그는 밀밭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농부로서 대지를 바라본다. 그가 일하는 방식은 삯꾼과 달라서 가라지를 뽑자고 밀밭을 망가트리는 일이 없다. 밀밭은 인류의 미래이기 이전 당신의 미래인 것이다. 이것이 밀밭을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고, 모든 태도는 여기서 결정된다. 심판의 최종적 권한은 일꾼이 아니라 주인이며, 주인이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연유다.(마태 13,28-29) 

그러니 다 떠나서 추수 밭의 일꾼은 가장 먼저 밀밭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배울 일이다. 그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고, 그가 행하는 것을 행할 일이다. 그 자신이 밀밭의 궁극적 미래로 나섰음을 의심치 말 일이다. 아직도 성장주의에 취해 함부로 밀밭을 훼손하는 자들은 한시바삐 환상에서 깨어나라. 지구의 마지막 시침을 늦추는 근본적 해결책은 현재와 같은 생산체계를 멈추고, 거기에 맞춰 춤추며 돌아가는 우리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제야말로 방향을 틀고, 다시 대지를 바라보며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 길 외에 다른 미래는 없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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