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페미언니와 성·사랑·몸 수업]

지난주 금요일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간만에 성당을 찾았다. 코로나 집단감염을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미사를 드릴 수 있어 설레기도 했다. 신부님들과 봉사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방역을 관리하였고 신자들은 협조했다. 미사 시간 내내 간격을 두어 떨어져 앉기는 사랑하는 사이에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날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다.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되새기는 날이다. 보통 평일 미사에는 독서가 한 개지만 특별히 대축일이라 그 의미를 알려주는 제2독서도 읽었다.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여러 가치 중 으뜸인 사랑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7.10.12)

일상은 팍팍하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인생에 스며든 소중한 관계를 누구보다 잘 가꿔나가고 싶을 때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는 좋은 영감을 준다. 하지만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정확하게 와 닿지 않을 때도 있는데, 혹시 사랑이 구축되는 섬세한 맥락과 과정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오직 너, 라는 유일무이함에 집중해야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과정으로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는 면이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누군가가 사랑의 출발점이 될 수 없으며 하느님이 절대적인 첫 번째여야 한다고 가르쳤다.1) 이렇게 보면 사랑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며, 타인은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는 도구가 된다.

한나 아렌트의 연구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웃이 무엇을 하든 누구든 상관없이 불편부당한 태도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때 사랑받는 것은 각각의 개성이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공유하는 신의 모상적 자질이 된다. 그녀는 그리스도교인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때 사랑받는 모든 이는 신을 사랑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고 지적하였다.2)

그러나 어떤 이를 특별하게 인식하고 나의 고유성을 적확하게 알아보는 짝꿍이라는 느낌은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왜 하필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B,C,D가 아닌 A였어야 했는지는 그리스도교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지속적으로 A의 유일무이함을 복기하는 과정이 사랑을 가꾸는 데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이 간과돼선 안 된다. 둘의 서사를 씨실과 날실처럼 한 올씩 엮어내는 과정을 하느님, 이웃, 원수에게로 지체 없이 확장하려는 시도가 사랑에 항상 좋은 것인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을 ‘어떻게’ 건설할까?

사랑이 되려면 둘의 세계를 우선 잘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향해 넓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사랑이 구축되는 수많은 결과와 지난한 과정을 다소 생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창조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사랑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랑에는 보편적인 힘과 초월적인 면이 존재한다는 그리스도교의 발견이 탁월하긴 하지만, 바디우는 그런 사랑관을 좋아하지 않았다.3) 그가 권장한 인간적인 사랑의 모습은 미리 만들어진 기준과 통념을 따르지 않아 위험을 동반하고 모험을 감수하면서 두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계기로 사랑에 빠지고, 서로 간에 사랑을 선언하는 국면과 각자의 고요한 결심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세계관을 섞으며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같이 극복해낼 노하우를 쌓는다. 이러한 실천과정 속에 사랑이 계속해서 두텁게 깃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어떻게’를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변화하는 매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사랑의 구체적인 단계들을 지나치지 말자고.

있는 그대로의 맨몸과 살 그 자체로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냄새, 물질, 소리를 공유할 수 있는 관계인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이성애 혼인 가정의 틀이 가린 섹슈얼리티의 기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2005)에도 남녀 간의 사랑과 신앙의 연관성이 나온다. 여기서 남녀의 에로스는 아가페로 변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난다고 강조된다(5항). 에로스를 추구하는 과정에 신앙이 개입하여 그 사랑을 정화하고 동시에 새 차원을 열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한과 영원을 약속하고, 정화와 성숙을 요구하며, 포기와 희생을 각오하는 것인데 혼인이 이를 보장할 유일한 제도로서 옹호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사랑의 기본형으로 보며, 이성애 혼인 가정의 틀 안에서의 사랑만을 인정해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성 간에 사랑을 잘 꾸려나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충실하게 제안해오지 못한 것 같다.

이는 남녀의 성관계를 곧바로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으로 사유해온 관성 때문일 수 있다. 몸으로 겪는 사랑에서 중요한 다른 가치들을 못 보게 만든 것이다. 스스로의 몸의 감각을 바탕으로 솔직한 성적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해내는 것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현재 상황을 명료히 보이게끔 해준다. 있는 그대로의 맨몸과 살 그 자체로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냄새, 물질, 소리를 공유할 수 있는 관계인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즉 꾸밈없이 신체적 존재 자체로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에로스/아가페의 추상적 개념이나 혼인 상태라는 지위, 생명에의 개방성 유무가 자동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주체 의지로 끊임없이 해내는 선택과 조정

사랑을 하다 보면 이것이 하느님이 내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라 느낄 만큼 신비로운 순간이 많지만, 그럼에도 나의 선택과 의지를 발휘하고 재확인해가는 작업 또한 무척 중요하다. 그래야 사랑의 과정이 자기를 긍정하고 자아를 성장시키는 경험으로 의미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수사학은 사랑을 건강하게 일구는 데 필수적인 선택과 조정의 과정을 다소 가리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바오로 성인이 참된 사랑의 특성을 “참고 기다리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견디어 낸다”고 표현한 것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1코린 13,4.7).

평등하게 소통하고 치열하게 협상하는 과정은 사랑의 능력치를 키운다. 적합하지 않은 관계가 시작됐을 때 그것을 주체적으로 식별하고 잘 정리해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가능성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이 글은 나의 고민의 과정 중에 쓰인 완결되지 않은 단상이다. 유독 조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온 사랑이 이 세상 모든 사랑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사랑의 방법론을 배우고자 하는 크리스천 청년 여성의 입장에서의 아쉬움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평생에 걸친 공부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유동적인 삶에서 사랑만큼은 유일하게 안정된 정박지로 만들기 위해 공들이는 매 순간의 행위들은 어떤 면에서 간절한 신앙의 모습과 유사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랑의 기쁨"(2016)에서 말했듯,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 얻은 것에서 나오는 기쁨보다 더 심오하고 황홀한 인간적 기쁨은 없을 것이다.”(130항)

1)"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김혜숙, 사람과 사랑, 2014, p.144.2)"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도서출판 텍스트, 2013, p.171.3)"사랑 예찬", 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p.75.

강석주(카타리나)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여성학 협동과정 박사 수료. ‘페미니즘 시대, 실천적 종교연구를 위한 시론’, ‘낙태죄 판결의 의미와 가톨릭의 과제’, ‘아일랜드 국민들의 정의로운 선택’ 등을 썼다. 현재 ‘여성 종교인의 임신중지 체험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논문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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