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페미언니와 성·사랑·몸 수업]

가톨릭교회는 성모님을 다양한 호칭으로 부른다. 믿음의 샘, 은총의 중재자, 근심하는 이의 위안, 신비로운 장미, 죄인들의 피난처, 신자들의 도움, 하늘의 문, 거룩하신 동정녀, 평화의 모후 등 그녀에겐 무수한 이름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마리아를 묘사하는 것에 비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일관된 것 같다. 죄에 물들지 않아 맑고 깨끗하며 순종적인 여인이요, 온화하고 자애롭게 헌신하는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성모 성월을 보내면서 그녀의 삶에 대해 조금은 평범한 시선에서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는 많은 신자에게도 관점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교부들이 부여한 담론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리아라는 여성이 엄마로서 성장해 가며 살아냈을 삶을 인간적으로 따라가 보기 위한 노력이다. 

나자렛이라는 한 가난한 마을에 흔한 이름을 가진 젊은 처녀가 살았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정혼자가 모르는 일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출산하겠다는 결심도 한다. 앞으로의 인생이 어떤 위험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삶 전체를 송두리째 내어 놓는 대범함을 보여 준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천사에게 대답한 마리아의 응답(fiat)은 흔히 순명하는 종의 자세로 여겨지지만, 사실 엄청나게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결단이며 역사 속의 어떤 이보다 의연한 주체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성모 마리아.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녀는 임신한 열 달 동안 수많은 몸의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매우 추상적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보통 인간들의 출산 과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 길을 걸어가 마구간의 말 구유에서 분만해야 했다면 산모가 놓인 상황은 몹시 열악했으리라 짐작된다. 자궁이 부풀어 오르고 양수가 터지면서 많은 출혈과 함께 분비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생명을 몸속에서 길러내고 출산 후엔 자신의 몸을 먹이면서 키워내야 했을 그녀의 신체적 활동에 대해서는 되도록 가려지고 신비화되어 있지만 마리아 역시 우리 모두의 엄마들이 겪어 온 노고를 똑같이 거쳤을 것이다. 이 체험의 길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안나와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을 떠올리며 그녀들과 연결된 심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12살 된 아들을 축제 기간에 잃어버렸을 때에는 사흘 동안 속을 새까맣게 애태우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았다. 하지만 아들로부터 서운한 말을 듣게 된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이 같은 예상치 못한 일들은 어머니가 자녀를 객관적인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므로 어머니 자신에게도 성장의 계기가 된다. 미국의 철학자 사라 러딕은 "모성적 사유"(maternal thinking)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이것은 사회가 엄마들에게 당연히 기대하고 손쉽게 요구하는 모성애와 구분된다. 오히려 어린이를 양육하고 훈육하는 전략들을 고안해 내면서 자신의 관행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게 되는 일종의 훈련에 가깝다. 마리아 역시도 모성적 사유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며 어머니 역할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식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며 신앙에도 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사도들의 든든한 동반자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사업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다고 전해진다.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가 말해 주는 것처럼 하느님이 굶주린 이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는 강한 믿음을 그녀가 처음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1,52-53) 초기 교회의 목표는 세상의 변두리에서 핍박 받아온 이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의 삶을 살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선악과를 따 먹은 여성, 동정녀가 아닌 여인, 죄를 지었으나 회개한 사람들을 품어내는 넓은 그릇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일생 동안 성장하는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었지만, 그녀만의 인상적인 성격적 특징이 있다.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반응하기보다 그에 대해 간직하고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 습관이 있었다. 마리아를 교회의 모범으로 고백하고 한국 교회의 수호자로 정한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는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와 처리, 분석과 비판 역시 극도로 많고 즉각적이다. 너도 나도 전문가가 되어 해법을 제시하려 하는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은 하느님의 참 뜻을 곰곰이 헤아리던 마리아의 표양을 닮으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해 보면 어떨까.

강석주(카타리나)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여성학 협동과정 박사 수료. ‘페미니즘 시대, 실천적 종교연구를 위한 시론’, ‘낙태죄 판결의 의미와 가톨릭의 과제’, ‘아일랜드 국민들의 정의로운 선택’ 등을 썼다. 현재 ‘여성 종교인의 임신중지 체험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논문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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