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신정식]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3-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4월 봄날, 따뜻한 바람과 봄내음이 느껴지면 사람들은 나들이를 나설 거다. 또 누군가는 4월의 온도와 냄새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이 촉발해 큰 비탄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2014년 4·16 세월호참사는 24시간 미디어를 통해 침몰하는 선체 속에 갇힌 사람들과 수많은 학생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모두는 공포, 분노, 무력감, 슬픔과 비판을 경험했다. 이후 한참이나 뜨거웠던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하는 진실과 기억, 정체성의 정치 공방이 계속되어 왔다.

6년의 세월 동안 나는 사회적 고통을 마주하며 몸과 가슴으로 무엇을 느끼고 경험했나? 사회적 치유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것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시사적 해석이 아니라 삶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과 현존하며 살아가는 주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개인, 관계, 문화, 정치경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결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사회적 치유에 관한 성찰을 함께 나누고 싶다. 자극과 반응을 반복한다면, 필요한 것은 멈춤이고 그 사이에서 길어올릴 사유다.

몸과 마음으로 마주하는 사회적 고통

사회적 참사의 치유를 위해 개인들의 스트레스 반응에 대한 몸과 마음의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생존이 위협받는 세월호참사 같은 상황에서 개인의 신경계는 몸을 전투 또는 도피의 태세로 준비시킨다. 심박과 호흡이 빨라지고 손발에 땀이 나고 혈액과 에너지가 온몸에 퍼져간다. 가장 큰 위협요소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싸우거나 도망칠 수 없게 되면, 본능적으로 몸은 얼어붙고 무감각해진다.

이 경보 시스템을 통해 사회적 참사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참사 후 구조를 못 하는 상황에 분노했고, 계속되는 뉴스를 피하고 싶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무감각해져 갔다. 자기 보존을 위한 본능적 과정이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생존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 에너지가 해소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평화로운 시절에도 자주 싸움, 회피, 얼어붙는 태세를 취한다. 넓은 의식과 복합적 판단보다는 선과 악, 아군 대 적군, 안전과 위험의 흑백논리를 취하기 쉽다.

충격적인 사건 후 숨을 내쉬며 몸을 떠는 야생동물과 달리 이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오히려 그 에너지를 해소하며 사는 건 쉽지 않다. 자주 자연발생적 에너지를 잠그고 억압해 버린다. ‘울지 마라’, ‘한숨 쉬지 마라’는 말을 일상에서 자주 듣고 또 자주 쓰기도 한다. 낯설게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 힘을 가진 입장이 되어야 할 수 있는 말은 아닐까? 사회학자에게 들은 사례가 있다. 한국전쟁 후 추모 행사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흐느껴 울자 국가원수는 ‘나라를 위한 죽음인데 울지 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탄과 눈물을 억압하는 힘, 현대사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안보, 경제발전, 경쟁 우위를 위해 울지 말고 계속 나가라. 파이팅! 응원 구호처럼 어느새 우리는 슬픔을 억압하는 힘에 동화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치유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해소가 시작된다. 관계에서 수용과 지지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인내력의 창을 더 넓혀 준다. 우리의 본성인 약함을 서로 비난받지 않을 때, 나의 고통은 너의 고통과 싸우지 않고 안전할 수 있다. 안전함을 느낄 때 신경계와 근육은 이완되고, 의식은 신뢰와 조절이 가능한 정도로 확장된다.

사이렌이 울려 대는 마을에 사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 공습 대피 사이렌이 울리면 마을의 모든 불을 소등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을 대비하는 훈련은 멈추었지만, 우리는 쉽게 오작동해 사이렌을 울리고 전투태세를 취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는 4·3사건, 한국전쟁, 5·18 민주화운동 같은 수많은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다. 그때 생성되었을 개인과 공동체의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치유하며 살아왔을까? 풀어내지 못한 에너지가 사회적 상황과 만나면서 복잡한 경로와 형태로 전이되는지 모른다. 세월호참사 후 광화문에서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으며 조롱했던 사건이 있다. 안산의 거리에 가까운 이웃들이 내건 부정의 현수막, 행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폄훼의 말이 당사자들을 더 아프게 했다. 그중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청문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유가족 아버지는 물에 퉁퉁 불어 기괴해진 아들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아이의 주검을 본 부모들은 곳곳에서 오열했다. 동시에 밖에서는 애국가가 크게 울려 퍼졌다. 베트남파병군인회 회원들은 군복을 입고 모여 청문회 중단을 요구했다. 정치적 입장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보였던 모습들이다. 문득 그분 중 많은 사람이 고엽제 피해로 평생 통증을 안고 살아갔으며, 국가로부터 충분한 지원과 돌봄을 받지 못한 현실이 떠올랐다. 아픈 이가 또 다른 아픈 이와 연결되지 못하고 상처를 더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경하면서도 생생했던 순간이었다.

2019년 4월, 어느새 녹이 슨 세월호 앞. '기억 순례'에 참여한 광주대교구 청년과 청소년들 400여 명은 새삼 말을 잃었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정현진 기자

테라피적인 사회를 넘어 함께하는 사회적 치유

고통을 살아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해, 사이렌을 울리며 적대하는 관계와 공동체를 위해 그동안 간과했던 돌봄과 치유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4·16 세월호참사 후 ‘트라우마’와 ‘치유’가 시대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재난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 처음으로 많은 공공과 민간자원이 투여된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심리적 접근은 자칫 사회적 고통의 총체적 원인과 당사자의 경험을 축소하고 심리적으로 환원하는 위험이 있다. 테라피적인 사회와 치유 서비스는 친자본적이고, 권력적인 동기와 잘 부합하는 쉬운 처방전일 수 있다.

세월호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질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당사자가 처한 시기, 상황, 요구에 기반하지 않은 의료적 관점과 접근이 효과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반감을 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지역사회의 자원과 주체가 연결되지 않은 채 분절되고, 관료적이었던 제공 방식의 한계다. 사회적 참사는 정신의학의 개념이나 행정 집행이 아니라, 다양한 불의와 영향에 대한 당사자의 증언으로도 정의되어야 한다. 치유의 노력 역시 당사자와 공동체가 가진 자원, 연결, 가치, 목적, 행위에 기반해 조정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치유는 진상규명, 배·보상, 사죄와 재발 방지, 추모, 현실적 안정과 필요에 대한 지원, 화해와 사회적 재연결 등을 총체적으로 포괄할 때 가능해진다. 그리고 치유를 제공하는 가장 좋은 주체는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다. 당사자가 원하는 치유는 복잡하거나 전문적이지 않았다. 개념으로는 알지만 우리에게 충분히 체화되지 않은 관계 속의 존중, 공감, 소통을 말한다. 이웃 주민, 미디어, 공무원, 지원 제공자, 정치인까지 사회의 다양한 주체가 어떻게 행동할 때 해로움을 끼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지지와 도움이 되는 행동인지,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안정화하는 태도와 가치는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회적 인식과 체화가 치유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된다.

고통, 소중한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로 경청하기

세월호를 이야기하다 그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이 크고 어둡게 느껴져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럴 때 나는 아주 궁금해져, 소중하게 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분명히 그 표현 속에는 ‘부재하지만 암시적인 것’이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심리적 고통은 소중한 것이 손상되고 침해되었다는 ‘증거’다. 고통은 삶의 소중한 목적, 정의와 관련된 가치와 신념, 삶에서 가졌던 희망, 세상에 대한 도덕적 전망, 삶의 방식에 대한 소신과 그것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 지를 반영한다.

사람들은 상황을 중단시킬 힘이 없을 때조차 삶의 위기에 대응한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 질문받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 행위 주체로의 행동을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손상되고 부정적이었던 정체성의 감각이 한순간에 대체되는 전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2019년, 세월호참사 5주기 미사가 봉헌된 수원가톨릭대 임마누엘 경당 앞 울타리에 걸린 추모 메시지. ⓒ김수나 기자

피해자에서 기여자로 살아가기

사회적 참사의 당사자를 만나면서 알게 된 하나의 공통된 현상이 있다. 그들이 피해자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더 나아가 기여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고통을 가져오는 세상을 변화시켜 다른 이의 아픔을 예방하고, 자신들의 역경이 가치 있을 수 있기를 원한다.

4·16 세월호참사 당사자들은 은폐·축소하려는 권력, 다시 고통을 재현할 수도 있는 힘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것은 제도화된 정치와는 동기가 다르다. 비통한 자들의 마음에서 시작된 두려움 없는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만난 한 유가족에게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의 사망 사고 후 세월호 유가족들이 김용균 씨의 어머니를 찾아가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아픔을 자극할 수 있는 젊은 자녀의 죽음과 마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테지만, 아픔으로 연결되어 서로 위로와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고 했다. 또 세월호 생존자와 트라우마를 가진 청년들이 만든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단체와도 만나 함께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을 놀이로 익히는 재난보드 게임을 학교에서 진행한 일도 있었다. 청년들은 아동과 청소년들이 쉽게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치유될 수 있도록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수많은 사회적 참사 생존자 및 유가족이 이러한 활동을 하리라 생각한다.

사회적 참사 후 사람들의 자조 섞인 말들을 듣게 된다. ‘믿을 수 없는 세상,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와 가족이라도 잘 지키며 살아가야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지고, 자신을 더 챙기려는 이기심에 머물러 있을 때, 상처 입은 치유자와 활동가들은 사람들이 좀 더 존중되고 안전할 수 있게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자청했으며 무관심으로 지나쳐 갈 사회 이슈에서 변화를 가져올 동력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고통에 매몰되거나 피하지 않고 고통 이면의 함께 추구할 가치들로 연결될 때, 사건 후 나누어진 외집단의 사람들이 아니라 동료로 만날 수 있다.

오늘 여기, 상처받은 공동체의 마음 치유해 가기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을 만난다면, 애써 잊으려 말라고 말해줄 거다. 애도는 그 존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완성될 수 없는 일이기에 소중한 이와 계속해 가는 대화의 여정이다. 

4·16 세월호참사 6주기, 공동체의 멤버로서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로 애도와 치유의 대화를 계속해 갈 수 있다. 자신과 연결되는 사회적 참사를 떠올리고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면 대화를 시작할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사회적 치유는 ‘기억하자’는 구호와 노란 리본, 추모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삶의 맥락 가운데서 사유되고 실천되는 작은 것일 수 있다. 차이와 갈등 속에서도 침착, 자비, 책임감을 잃지 않고 대화하는 경험, 사람들의 약함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일, 아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슬픈 이를 더 안아주는 손과 시간이 마음의 습관이 되고 내가 소속된 집단의 일상적 문화를 조금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사회적 치유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의 말처럼 우리는 부서지고 파편화(Broken apart)되어 개인적 패배감에 분노, 우울, 이탈에 머물 수도 있지만, 깨어지고 열려서(Broken open) 세상의 운동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신정식

예수회가 운영하는 국제구호개발NGO 기쁨나눔재단에서 인도적심리사회지원단 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집단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치유에 관심을 가지고 국내외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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