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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10월 15-20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세례받은 모든 이는 말씀의 선포에 협력”

교종, 10월20일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연중 제29주일이자 전교주일인 10월20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세례받은 모든 이는 예수님 안에서 자비가 죄를 이기고, 희망이 두려움을 이기며, 형제애가 적대감을 이긴다는 기쁜 소식을, 새로운 열정으로, 어디에서든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전례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충실한 협력자인 티모테오에게 보낸 권고를 들려줍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사도 바오로는 비장한 억양으로 말합니다. 티모테오는 말씀의 선포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전교주일은 세례받은 모든 이가 말씀의 선포에 새로운 책임을 통해 하느님나라 선포에 협력할 필요성에 대해 더 깊은 의식을 갖기 위한 좋은 기회입니다. 

100년 전 베네딕토 15세 교종님은 교회 전체의 선교책임에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를 선포했습니다. 모든 식민지화의 잔재에서 정화되고 유럽 국가의 정치적 확장정책 조건에서 벗어나도록, 세상 안에 선교를 복음적으로 재평가할 필요성을 경고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변화된 맥락에서도 베네딕토 15세 교종님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 메시지는 복음의 기쁜 소식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자기중심적인 닫힌 마음’과 온갖 형태의 사목적 비관주의 유혹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자극합니다. 

우리 시대는 민족들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세계화를 지지하는 것으로 특징되지만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고 지구를 파괴하는 오랜 권력다툼과 획일화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신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비가 죄를 이기고 희망이 두려움을 이기며, 형제애가 적대감을 이긴다는 기쁜소식을 새로운 열정으로 어디에서든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분열이 극복됩니다. 오직 그분 안에 모든 인간과 모든 민족의 구원이 있습니다.

선교사명을 온전히 살아 내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있습니다. 곧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바치는 열성적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루카 18,1)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는 선교사들을 위한 하느님 백성의 첫 번째 도움입니다. 선교사들은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의 빛과 은총을 주는 사람들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어려움에도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봅시다. ‘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멀리 떠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 함께 생각해 봅시다. 모든 민족들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복음의 선교사들을 매일 동행하시고 보호해 주소서.

 

“형제들을 가려서 선택하지 말고 받아들이시오”

교종, 10월20일 성 베드로 대성전 전교주일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0월20일 제93차 전교주일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봉헌한 미사 강론을 통해 선교란 ‘견뎌야 하는 짐이 아니라 봉헌해야 할 선물’이라면서 사랑으로 모든 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우리가 방금 들은 독서에서 저는 세 단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각각 명사, 동사, 형용사입니다. 먼저 명사는 ‘그 산’이란 단어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하면서 말했던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민족이 그리로 밀려드는 주님의 산입니다.(이사 2,2 참조) 우리는 산에 대한 언급을 복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다시 만날 장소로 갈릴래아의 산을 언급하십니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으로 붐비는 갈릴래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 참조)의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산은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에게 약속하신 장소로 보입니다. 

산은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듯 시나이산에서 가르멜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참 행복을 선포하셨고 타보르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으며, 해골산 골고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고 올리브산에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큰 만남의 장소인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며 시간을 보내신 곳이기도 합니다. 땅과 하늘을 일치시키시려고 당신 형제들인 우리를 아버지와 일치시키시려고 말입니다.(마르 6,46 참조) 

우리에게 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하느님과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깎아내리는 험담과 잡담에서 거리를 두면서 침묵과 기도 안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에서는 다른 전망도 보입니다. 모든 이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전망입니다. 높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보입니다. 높은 곳에서 볼 때 조화로운 아름다움이란 오직 함께 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은 형제자매를 가려서 선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삶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산은 유일한 포옹, 곧 기도의 포옹 안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을 일치시킵니다. 

산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끕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물질적인 것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곳으로 이끕니다. 본질적인 것을 되찾도록, 다시 말해 영원히 남는 것, 곧 하느님과 형제들을 되찾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선교는 산 위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거기서 중요한 것이 발견됩니다. 전교의 달을 지내면서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내 인생의 정점은 무엇인가? 내가 올라야 할 그 꼭대기는 무엇인가?’

명사인 산과 동반하는 동사가 있습니다. 곧 ‘오르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이사 2,3) 우리는 땅에 서 있기 위해 평범한 것에 만족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하느님과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삶을 포기하고 이기주의라는 중력에 저항해야 합니다. 따라서 올라간다는 것은 힘든 노고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모든 것을 더 잘 보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마치 산에 갈 때 오직 정상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올라가는 길을 통하지 않는다면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면 잘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인생에서도 필요 없는 것을 비워 가벼워져야 합니다. 이는 선교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떠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고 ‘선포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선포는 미사여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곧, 우리 마음을 옹졸하고 무관심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 안에 가두는 수많은 물질적인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섬김’의 삶입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무익한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과 타인을 위한 시간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나는 올라가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 무겁고 무익한 짐들을 포기할 줄 아는가? 불필요한 짐을 버리고 오르는가 아니면 세속적인 무거운 짐을 안고 기어오르는 길인가?’

만일 산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 곧 하느님과 형제들을 떠올리고, ‘올라가다’는 동사가 ‘도착하다’는 동사와 동일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면 세 번째 단어는 오늘 가장 강력하게 들립니다. 그것은 형용사 ‘모든’입니다. 이 단어는 전례 독서 전체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사 2,2)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에도 ‘모든 민족들’이 반복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라고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고 요구하십니다.(마태 28,19) 주님께서는 이 ‘모든’을 집요하게 되풀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나의 것’과 ‘우리 것’을 고집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것들, 우리 사람들, 우리 공동체, 그런데 그분께서는 ‘모든’을 지치지 않고 되풀이하십니다. 아무도 그분의 마음, 그분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기에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인간적인 관점을 넘어서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이기주의에 토대를 둔 특혜, 특수주의,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서기에 ‘모든’ 것입니다. 각자가 소중한 보물이고 삶의 의미란 타인에게 이 보물을 선사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모든’ 이의 선물로 내어 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것과 내려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움직이고, 바깥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사용하신 명령법은 ‘너희는 가서’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가? 나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다만 나의 일을 하는가?’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군가 일을 대신 해 주기를 기다리지만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는 결코 타인이 알아주는 것을 담보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담보로 합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는 오로지 자기 사람들, 자기 단체 구성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만나러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증언할 기회를 잃지 마라!”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로지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증거를 여러분에게서 기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 건네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그 메시지, 그 말씀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그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중한 사명에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교종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24항) 

‘모든’ 이에 가기 위해 주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한 가지뿐입니다. 아주 단순하죠. 곧 ‘제자로 삼아라’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그분’의 제자이지, 우리의 제자로 삼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오로지 그분의 제자로 살아갈 때 제대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울러 제자는 매일 스승을 따르고 제자 됨의 기쁨을 타인과 나눕니다. 정복하고, 강요하며, 개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증거하면서’, 제자 대 제자로 겸손하게 다른 제자들과 나란히, 우리가 받았던 그 사랑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곧 세상의 오염에 잠긴 사람들에게 순수하고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산 위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 주는 그 평화를 지상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고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는 우리의 말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각자는 “이 땅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우리는 여기에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고, 찬미하며, 위로하고, 다시 일으키며, 전하기 위해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자녀임을, 생명과 성령을 주신 형제임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을 걱정하십니다. 예수님의 걱정을 덜어 드리고 싶습니까? 사랑을 갖고 모든 이에게 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하나의 소중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견뎌야 하는 짐이 아니라, 봉헌해야 할 선물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향해 나아갑시다!

 

아마존 주민들과 순교자들 위한 십자가의 길

아마존의 순교자들과 아마존 우림의 유린당한 권리, 그리고 바티칸에서 진행되고 있는 ‘범아마존 지역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특별회의(아마존 시노드)’의 주제와 아마존 지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가 10월19일 바티칸과 연결된 산 탄젤로 성에서 성 베드로 광장까지 전 세계에서 온 신자들과 주교와 일부 시노드 교부들이 참가한 가운데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REPAM)’와 ‘아마존 우림 공동의 집’ 주관으로 거행됐다.

이날 신자들의 성가는 아마존 토착 원주민들을 향한 폭력과 억압을 기억하게 했다. 전통적 머리장식과 악기를 든 10여 명이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폰티나 성당’에서 기도하고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화해의 길)로 행렬했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각 처마다 라틴아메리카 순교자들 중 한 사람 그리고 인간뿐 아니라 산림벌채와 석유개발과 같은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아마존에서 유린당한 권리 한 가지씩을 기억했다. 각 십자가에는 아마존 우림과 그곳 주민들이 담긴 사진들이 못 박혀 있었다. 신자들은 돌아가면서 하나의 흰색 천 위에 남아메리카의 거대한 산림지대를 살리기 위한 자신의 생각을 썼다. 십자가의 길 마지막에는 아르헨티나 평화주의자 겸 198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에스키벨의 몇몇 그림도 보였다. 

이날 참석한 시노드 교부들 중에는 페루 우앙카요 대교구장 겸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REPAM)’ 부의장 바레토 히메노 추기경도 있었다. 그는 이제 현실이 되고 있는 이 꿈의 중요한 주인공인 토착 원주민들이 실존적이고 지리적 주변부인 아마존 우림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의 중심인 로마에 있다고 말했다. 바레토 추기경은 이날 십자가의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형제들과 고통을 겪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과 복음의 기쁨을 살고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아마존 우림은 존엄성 존중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마존 시노드, 두 번째 주간의 중요한 행사들

아마존 시노드 두 번째 주간의 가장 중요한 행사 가운데는 이번 역사적인 시노드에 참여한 토착 원주민단체와 프란치스코 교종의 만남이 있었다. 이 만남은 아마존 세계 전체에 대한 교회의 동맹을 형성하는 것으로 10월16일 오후 이뤄졌다. 교종과 토착 원주민들 만남은 의견교환과 발표와 청취의 시간으로 구성됐다. 토착 원주민들은 교종이 가까이 있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는 한편 도움을 요청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민족들로 하여금 복음이 어떻게 토착화돼야 하는지와 관련해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함께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마존 시노드는 10월27일 폐막하지만 약 40명의 토착 원주민들은 이번 시노드가 그들의 존엄성과 그들의 땅을 살릴 것으로 희망하고 있다. 토착화는 다양한 총회에서 나온 작업들과 소그룹 회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 가운데 하나다. 소그룹 회의에서는 모든 참가자들로 하여금 의견을 표명하게 했다. 아마존 시노드에서 공유된 전망은 토착 원주민 모습에서 하나의 이론과 하나의 사목을 강화하는 것인데, 여기서 교회의 과제는 아마존 지역 주민들을 위한 결정이 아니라 대화와 경청하기의 ‘공동합의적’ 관점 안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토론의 중심에는 땅이나 물을 대상으로 한 무분별한 착취에 대한 단정적 거부의 의미, 곧 환경보호가 있었다. 또 평신도 직무에 관한 공식적 승인에 대한 희망과 요구가 있었는데, 특히 여기에는 시노드 교부들이 인정한 여성의 역할도 포함돼 있었다. 여성의 역할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보살핌과 같이 생명의 보호와 관리에 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수차례 등장한 또 다른 의견은 특별히 지역주민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문화교육의 중요성이다. 토착 원주민의 대학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연대하며 전략을 형성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로써 언제나 대화나 상호교류라는 이름으로 아마존의 지혜를 지키면서 문화적 정체성의 권리를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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