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연중 기획 1] 노동 : 부산교구 노동사목 이영훈 신부(1)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신년 기획으로 2019년, 한국사회가 직면한 주요 이슈를 어떻게 읽고 대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했다. “노동, 평화, 인권, 농업” 등 네 가지 주제에 대한 교회 안팎의 전문가 또는 당사자로부터 그동안 우리가 각 이슈에서 놓친 것은 무엇이며, 새롭게 인식할 것들은 무엇인지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기사 순서

1. 노동 : 김선기 서울일반노조 교육선전국장 / 부산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이영훈 신부

2. 평화 : 이대훈 성공회대 교수 /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강주석 신부

3. 인권 : 이성훈 한국 인권재단 이사 /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나승구 신부

4. 농업 : 가톨릭농민회 정한길 회장 /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백광진 신부 
        /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재욱 소장

 

우리 사회  노동문제의 핵심과 그에 관한 교회의 역할을 짚고, 가톨릭 노동사목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한 이영훈 신부의 인터뷰 전문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지난해 천주교가 연대해 왔던 쌍용차, KTX, 삼성직업병, 파인텍 문제까지 해결됐는데 이를 어떻게 보는가?

-해당 노동자들의 포기하지 않은 의지와 연대의 힘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당사자의 의지가 없었다면 해결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기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다. 또한 이들과 긴 시간 동안 연대했던 많은 단체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 교회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의 가치와 그 열매를 우리 스스로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노동문제 해결에 있어 정권교체라는 ‘정치영역’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됐다. 물론 현 정권에서 모든 노동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지형의 변화와 거기에 따른 여론 형성이 문제 해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노동문제 해결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정치영역을 포함한 모든 세력의 연대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인간’을 ‘전인적(全人的)이고 통합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과 육의 영역을 함께 충족시켜야 하는 인간관, 노동과 인권, 생명과 환경 등 모든 영역이 조화롭게, 그리고 모든 것이 충족되는 인간관을 지향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조를 포함한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자기 영역의 문제를 자신만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운동 방식은 지금 시대에는 한계가 있다. 한 인간을 노동과 경제의 영역, 환경과 생명의 영역, 인권의 영역, 교육의 영역, 평화의 영역 등으로 나눌 수 없다. 이 모든 영역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어느 하나라도 소홀해지면, ‘인간 존엄성’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결국 지금의 사회문제 해결은 개인, 단체,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정치영역 등 모든 주체가 연대할 때 어느 정도 진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여기에 연대해야 할 것이다.

부산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이영훈 신부. (사진 출처 = 이영훈 신부 페이스북)

천주교는 왜 가장 힘든 노동자들과 연대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했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교황의 말은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의 사랑 계명 안에 ‘예외성’ 혹은 ‘긴급성’을 포함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이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특수한 경우 교회는 그중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대상에게 그 사랑이 먼저 돌아가도록, 그들과 연대하고 투신하도록 가르친다. 복음 정신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태오 복음 20장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가장 먼저 임금을 챙겨 준 이들은 맨 나중에, 가장 적게 일한 사람들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일한 사람들과 동등한 1데나리온을 준다. 가장 먼저 온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 차별, 불평등’을 느낄 수 있는 ‘동일한 임금’을 주인이 준다. 상식적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과 다르다. 주인(하느님)은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선택한 이들이 그날 일한 사람들 중 가장 볼품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해가 지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쓰려 하지 않을 만큼 ‘가성비’가 가장 떨어지는 비생산적인 ‘잉여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 여성, 어린아이, 장애인, 그리고 노동의 수요 과잉으로 더 이상 고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부양해야 할,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사정으로 며칠째 굶주리고 있는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생존’이 걸려 있는 위급 상황이다. 이러한 긴급성 때문에 주인은 가장 먼저, 그리고 차별적인 혹은 상대적으로는 후한 임금을 그들에게 주었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만나셨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하셨다. 그분의 제자라 하는 교회가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고, 만약 이를 주저하고, 거부한다면 교회는 그 존재 자체의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거짓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토머스 머튼의 말을 빌리자면,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를 살아가는 가짜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척’하는 가짜 그리스도인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알고 있는 것을 얼마만큼 실천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부끄럽다. 아는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노동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동문제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고, 국내에 한정돼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국제적이다. 또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닌 어제와 내일의 문제다. 그래서 명쾌하고 간단하게 ‘이것이 노동문제의 핵심이고, 이것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라는 용어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산업 구조가 ‘배척과 불평등의 구조’라는 점이다. 그 산업구조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이윤 추구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사용자는 최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를 배제하고 노동자에 무관심하다.

여기서 너무 안타까운 것은 요한 바오로2세 교황도 외쳤던 ‘노동자들의 결속’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노동자들 간의 갈등이다. 물론 노동자 간 갈등이 사용자 측의 경영 전략일 수도 있지만, 원청-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그들을 배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가 노동자를 배제하고 있다. 사용자들은 이것을 경영전략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산업구조에서 상생을 바라기는 어렵다. 오히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위험의 외주화, 산재은폐, 경영실패를 경영자가 책임지기보다 정리해고로 경영위기를 넘기려는 무책임,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평등, 남녀 노동자들 간의 차별, 청소년과 청년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등이 개선되기는 어렵다.

사측과 노동자가 날카롭게 대립할 때, 연대자로서 교회가 어떤 역할까지 할 수 있을까?

-교회의 역할은 ‘공감’과 ‘연대’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노동문제 전반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1970-9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교회가 노동운동에 결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노동소위가 고민하는 것도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회 역할을 고민하며 많은 교구가 노동사목의 관심을 정주(한국인)노동자에서 이주노동자로 옮긴 것이 아닌지? 그러나 아직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는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다. 교회가 여기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다만 아직 더 많은 고민해야 하고, 너무 늦지 않게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함께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교회 내에서부터 ‘노동과 노동자 그리고 노동운동’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동문제에 대응하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현재 모습과 한계가 있다면 무엇일까?

한국 가톨릭노동운동 역사에서 교회는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문제 해결에 매우 깊이 관여해 왔다. 하지만 민주노조가 탄생하고, 노조가 나름대로 역할을 하면서, 교회가 노동문제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사실 지금도 고민 중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교구는 국내 노동자가 아닌, 이주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려 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현재 교회는 ‘노동과 노동자’라는 접근보다는 신앙적 도움과 의료지원 같은 시혜적 도움에 만족한다고 본다. 수동적, 시혜적 관점에 머물고 있을 뿐 실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일깨우고, 그들이 겪는 노동문제에 도움을 주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여러 타 교구 노동자들이 저희 상담소에 노동문제로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교회의 현주소는 아닐까?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주노동자 중 누군가는 자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사용자로서 노동자를 고용할 텐데, 한국에서 왜곡된 노동의 가치를 습득하고 귀국했을 때, 그들 또한 ‘악덕사용자’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교회가 우리의 노동문제를 그들을 통해 다른 나라에 이식시키는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주노동자를 위한 교회라고 하지만, ‘노동과 노동자’가 없는 사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 본다. 제가 타 교구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부산도 자성하는 부분이다.

노동문제 등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사제들이 한정돼 있는 것 같다. 왜 그런가?

-부산교구를 예로 든다면, 부산교구는 신학생 때부터 노동사목에 관심 있는 학생들의 동아리 ‘밀알’이 있다. 신부가 되면 노동에 관심 있는 사제들의 모임, ‘밀알’에 다시 함께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밀알을 그만두는 신학생과 신부도 많고, 밀알 출신이면서도 현장에 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친구도 많다. 사실 저도 많이 부담스럽다. 가끔 선배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사제들이 가장 힘들어 하고 꺼려 하는 사목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에 격려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빠져나가기 어렵겠단 생각도 든다.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사제가 한정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도 노동문제를 포함한 사회문제를 ‘인권의 관점’이 아닌, ‘이념의 관점’으로 보는 사회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적 환경에 속한 신부들은 더 부담스럽다. 평신도와의 만남이 잦은 본당 신부들은 더할 것이다. 보수적 시선을 지닌 신자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 소신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회 참여가 소수에게만 한정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70년대부터 이미 앞선 선배들이 보여 주었듯 4대강, 강정, 밀양송전탑, 세월호, 그리고 최근 박근혜 정권을 향한 시국미사 등 수많은 사회문제에 많은 사제들이 함께해 주었다. 소수의 사제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제들이 지지,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비록 한정된 사제가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그들이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직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연대하는 사제들의 직무는 또 다른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참여에 있어서도 저마다 역할이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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