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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억과 참회의 사명[신학과 성찰 - 강주석]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성전(聖戰)과 교회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0년 10월 30일, 한 미국인 사제가 일본 주재 교황사절에게 한국의 소식을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유엔군에 의한 북진통일이 기대되던 당시 군의 특별한 허가를 받은 외국인 신부들은 38선 이북의 평안도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이 순례가 끝나고 작성된 편지는 평양교구(대목구)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처참하게 희생당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당신에게 알려야 할 매우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 프란치스코 주교를 비롯해 한 명도 빼지 않고 교구의 모든 신부들이 잡혀갔는데, 그들에 관한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시신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모두 죽었을까 봐 두렵습니다.

그들은 머리카락이 잘리고 평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시신 중에서) 그들을 식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전쟁 전까지 체포되지 않았던 신부들은 6월 24일 한밤중에 모두 잡혀갔습니다. 황해도에 5명의 신부가 있었는데, 그중 1명인 전 안드레아 신부가 교수형을 당한 것은 확실합니다. 성바오로수녀회의 김 안젤라 수녀와 김 마리아 수녀는 매를 맞아 죽었으며, 김 바울로 수녀도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신부와 수녀들에 대한 소식이 없지만,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알리겠습니다.

편지는 이어서 춘천과 대전 등지에서 희생당한 성직자들과 교회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도 기술한다. 참혹한 비극에 직면한 선교사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성전 감실 등의 성물(聖物)을 파괴하고, 성체를 모독하고, 성직자들을 살해할 정도로 “교회와 성직자를 극도로 미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교황사절에게 쓴 보고서에 명시하듯이 그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These Communists are not men but devils)”였던 것이다.(1)

한국전쟁을 직면한 천주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악마적’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로 표현했다. 전쟁 중에도 계속 발행된 <천주교회보>(2)는 이 사변을 바라보는 교회 지도자들의 시각을 드러내는데, 1950년 11월 10일 자에서 노기남 주교는 전쟁의 원인을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도 1951년 1월 14일 자에서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위선적 평화의 약속으로 약소민족을 마비시키는 크렘린의 죄악”도 크지만, “양을 가장한 일희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이라고 정리한다.(3)

당시 천주교회 책임자들이 바라본 한국전쟁은 분명 ‘악마적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에 가까웠다. 전쟁 초기부터 수많은 성직자를 잃는 등 희생을 치렀던 교회는 전쟁을 일으킨 세력을 극도로 증오했고,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마귀’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한국천주교회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공식적이고 열성적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이유 역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남한만의 총선거가 가시화되던 1948년 2월, 노기남 주교는 UN 한국위원회 제2분과위원회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현하는데, 여기서 노 주교는 소련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단정 수립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노 주교에게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실패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공산체제와 민주체제 사이에는 타협이나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그는 공산주의의 지배가 종교에 대한 박해를 의미하기 때문에, 남한사회에서 공산주의를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UN에 분명히 밝힌다.(4)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한발 더 나아간 교회 언론은 공산주의와 대결에서 무력투쟁까지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아직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11월 10일 자 <천주교회보>를 보면, 이미 시국을 준전시 상황으로 인식했던 교회는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지 이미 오래전이다”라고 역설하면서 신자들에게 비행기 헌납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5)

일제로부터 해방이 완성되지 못했고 민족이 분단되어 적대하게 된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에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공정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적’에 대한 군사적 투쟁까지 독려했다. 어쩌면 냉전의 전선이 구체화되던 당시 세계질서의 ‘현실’을 잘 이해했던 교회는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적’과의 대결을 불가피하다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전쟁

사실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 역사는 공산주의 세력의 등장과 함께 곧바로 시작됐다. 19세기 유럽에서 가톨릭교회는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변혁 사상과 종교적 자유사상을 경계하면서 특히 공산주의 사상을 단죄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회칙들을 통해서 공산주의를 오류라고 선언했으며, 이 새로운 사상이 신앙뿐 아니라 가톨릭교회가 지키고자 했던 ‘전통적’ 가치까지 훼손시킨다고 주장했다. 물론 19세기 말부터는 바티칸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고, 20세기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회칙에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1931)은 사회주의에 대해 일부 가치를 인정하는 변화된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 세력과 격렬하게 충돌하는 사태가 목도되면서, 결국 바티칸은 강력한 어조로 공산주의를 단죄하는 회칙을 발표한다.

1937년 발표된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Divini Redemptoris'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분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공산주의의 재앙이 그 논리적 귀결대로 다 이루어지기에는 시간이 아직 짧았지만, 본인이 사랑하는 스페인의 사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가 자행하는 잔학한 폭력에 의해서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느 특정한 교회나 특정한 수도원이 약탈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이 미치는 모든 교회와 모든 수도원이 다 파괴당하였다. …… 공산주의의 광포함은 주교들과 수천 명의 사제들과 남녀 수도자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노동 계급과 빈민들에게 평생을 헌신해온 사람들도 모두 색출해냈다. 그러나 희생자 대다수는 각계각층의 평신도들이다. 바로 이 순간까지도 선량한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유로,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수많은 신도들이 살육당하고 있다. …… 상식 있고 자기 책임을 의식하는 정치가라면 스페인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바가 내일에는 다른 문명국에서 반복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율을 금치 못할 것이다.(6)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와 심각하게 대립하면서 대규모 폭력을 경험하던 시기였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자행된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는 멕시코에서 박해가 있었고, 1930년대에는 스페인의 좌익 정부가 교회를 박해했다.(7)

소련과 멕시코와는 달리 스페인의 주교들은 박해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는데, 이러한 반공주의 움직임은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대다수 스페인 교회가 프랑코의 우파를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비오 11세 자신은 히틀러와 가까운 프랑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 교황에게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둘 다 단죄받아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37년 3월 14일에 나치를 비판하는 회칙 'Mit Brennender Sorge(교회와 독일제국에 관해서)'(8)를, 그리고 며칠 후 3월 19일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를 반포했다. 하지만 두 회칙에는 차이가 있었다. 독일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나치 정권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면서도 어떤 변화에 대한 여지를 남겨뒀다면,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는 공산주의와 협력할 가능성을 전혀 열어두지 않았다.(9)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바티칸은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교회의 반공주의에는 미국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국제사회에서 독보적 위치를 갖게 된 것처럼, 미국 가톨릭교회도 보편교회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반공주의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펠만(Francis J. Spellman) 주교와 쉰(Fulton J. Sheen) 주교 등이다. 미국 가톨릭의 주교들은 전후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세력이 대립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미국의 외교정책을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고 마침내 중국에서 공산화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바티칸의 반공주의 노선은 더욱 강경해졌다. 특히 1949년 7월에 발표된 '공산주의 반대에 관한 교령(Decree against Communism)'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실질적인 조처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바티칸이 직접 가톨릭 성직자나 신자들이 공산주의에 협력하는 것을 막는 지침을 내린 것이다.

기억의 정화

지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가톨릭교회는 과거사에 반성의 필요성을 분명히 했다. 교황청은 2000년 3월 7일에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을 발표하면서, “특별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교회에 편파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비난을 묵인하는 것일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죄를 인정하는 것과 화해로 나아가는 길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문헌은 희년 은총의 표지 중 하나인 ‘기억의 정화’가 “과거의 잘못들을 역사적 신학적으로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온갖 형태의 증오와 폭력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는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있고 겸손한 행위”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와 같은 보편교회의 적극적 노력과 함께 한국천주교회도 2000년 11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임시총회에서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확정했다. 이 문건의 3항에서는 “우리 교회는 광복 이후 전개된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하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합니다”라면서 해방공간과 전쟁 시기 교회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명시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교회는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고 가르치면서, 전쟁과 분쟁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으로 “당사자 모두의 깊고 진실하며 용기 있는 반성”을 제시한다.(10) 동서 냉전의 진행과 함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던 이 땅의 교회는 이제 ‘적’을 단죄하는 대신에 평화의 중재자가 되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 교회의 신앙을 거부하는 무신론적 사상, 그리고 그로 인한 폭력의 경험은 교회를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갈등은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규모 폭력과 전쟁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세상의 평화가 아닌 ‘교회의 평화’에만 집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상대를 ‘친구’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대립의 시대였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희생을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고, 너무 적극적으로 ‘성전聖戰’을 수행했던 과거를 참회해야 한다.

형제를 살해했던 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분단된 이 땅은 아직 적대의 폭력을 끝내지 못했다. 서로를 악마로 만들었던 분열의 시대를 끝내야 하는 소명을 가진 한국천주교회는 ‘적’과 화해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지난 역사가 주는 가르침을 함께 고민하고,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지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현세에서 완성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평화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 Excerpts of a letter from Father George Carroll to Archbishop de Furstenberg, Apostolic Delegate to Japan(Pyeng Yang, Korea Oct. 30. 1950).

(2) 1927년 4월 대구교구 청년연합회가 월간지로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1933년 폐간되었다가 1949년 복간됐다. 전쟁 중 유일하게 발행되었던 교회 언론이다.

(3) <천주교회보> 1951년 1월 14일 자; 문규현,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Ⅱ: 1945년부터"(빛두레, 1994), 220쪽 재인용.

(4) 김수자,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 1945~1953', <교회사연구> 제35집(교회사연구소, 2010), 78~79쪽.

(5) 문규현, 앞의 책, 217쪽.

(6) '하느님이신 구세주' 20항.

(7) 멕시코 교회에 대한 박해에 대응해서 1932년 회칙 'Acerba animi' (On the Persecution of the Church in Mexico), 스페인 교회 박해에 대해서는 1933년 회칙 'Dilectissima Nobis'(On the Persecution of the Church in Spain)을 각각 발표하기도 했다.

(8) 회칙 'Mit Brennender Sorge'의 주요 내용은 독일제국과 바티칸 사이에 맺어진 협약(Reichskonkordat)을 나치가 위반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독일교회 전반에 대한 박해에 강한 저항을 담았다. 하지만 이 회칙의 더 큰 의의는 인종과 혈통, 전체주의 국가 같은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들을 명백하게 논박했다는 데 있다. John Pollard, The Papacy in the Age of Totalitarianism, 1914~1958(Oxford University Press, 2014), pp.290~291.

(9) Peter C. Kent, The Lonely Cold War of Pope Pius XII: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Division of Europe, 1943~1950(McGill Queens Univ Press, 2002), pp.13~14.

(10)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교리", 517항.

강주석

의정부교구 사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임을 맡고 있으며,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다.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토머스대학교에서 정의평화학과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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