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평화협정 체결 선언....북한도 북미간 협정 제안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4년이다. 전쟁이 중단된 상태로 64년을 지내 왔지만 사실상 한반도는 전쟁을 완전히 끝낸 것도, 정전협정의 궁극적 목적인 평화 정착을 이룬 것도 아닌 지속적 위험 상태로 살아왔다.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 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 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정전협정문 60항)

정전협정문 60항은 이 협정이 명백히 이후의 '평화'를 위한 협정이며, 종전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한 시작임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협정 9개월 뒤,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을 논의하는 제네바회담이 열렸지만 결렬됐다. 그 뒤 평화협정 제안과 협상이 북한과 남한 내에서 이어졌지만, 안보문제와 이념에 따른 남남갈등, 또 다른 당사국인 미국의 입장이 엇갈려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부터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북한 핵개발 문제가 선결과제로 떠오르면서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은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평화협정 체결 의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평화협정 자체는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평화협정의 조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법적 협상 이후의 군사, 외교, 경제적 노력은 한반도 통일과 나아가 동북아평화를 위한 길이다.

정전협정은 무엇이고, 평화협정은 문서 상의 선언을 넘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살펴봤다.

▲ '분단에서 통일로' (사진 제공 = 참여연대)

‘종전’ 아닌 ‘정전’에 머문 64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51년 6월 유엔 사무총장과 소련, 유엔군이 정전협상을 제안하기로 합의하면서, 그해 7월 10일 협상 회담이 시작된다.

군사분계선 합의와 포로교환 문제를 골자로 한 합의 내용에서 포로교환 방식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아 협상은 1년 6개월간 이어졌고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는 정전협정문 60항에 따라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소련 등 19개국 외교장관들이 참석해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협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를 두고, 북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자는 한국과 미국의 안과 남북한 동시 선거를 치르자는 북한, 중국, 소련의 입장으로 나뉘어 끝내 결렬되고, 7월 21일 폐막했다. 이로써 남북 분단은 더 확고해진 채 지금으로 이어진다.

‘정전협정’은 단지 전쟁을 잠정 중단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확실히 종식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궁극적 목적으로 둔 협정이었다. 그러나 제네바회담 실패 뒤, 정전협정은 현재까지 60여 년간 무용지물로 존재해 왔고, 한반도를 사실상 전쟁 유지 상태로 만들었다. 특히 미국은 정전협정 직후 외국군 철수와 외부로부터 무기 도입 금지라는 협정 내용을 어기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미군을 계속 주둔시켰다. 지금까지 정전협정의 완료, 즉 평화협정에 주한미군철수 등 미국과의 군사, 외교적 관계가 불거지는 이유다.

정전협정과 제네바회담 뒤 평화협정을 먼저 제안한 것은 북한이다.

북한은 1974년 3월 25일 미국을 평화협정 대상으로 보고 북미평화협정체결을 제안한다. 그러나 미국이 남한과 북한,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 회담을 제안하자, 북한이 남한의 참여를 거부해 이뤄지지 못했다.

또 1984년 1월 북한은 다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남한과 북한, 미국이 참여하는 3자회담을 열어 남북불가침선언, 북미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한 정부가 미국을 빼고 남북한만 만나자며 거절했다.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남북과 미국 간 입장 차이가 이어지던 중 1980년대 말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그 배경은 탈냉전과 북한의 핵개발이다. 공산권과의 교류, 핵을 빌미로 한 북미 간 관계변화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뤘고,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서는 북미관계 정상화를 약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평화협정이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4년 5월 북한은 평화협정 전면화를 위해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하고, 1996년 2월에는 평화협정을 위한 중간 단계 협정을 제안한다.

이 상황에 대응해 한국과 미국은 남북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했고, 이 회담에서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긴장완화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지만, 결국 주한미군철수와 북미평화협정체결 문제로 1999년에 회담은 결렬됐다.

▲ 문재인 대통령은 7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평화로운 한반도로 가는 길은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선언했다. (사진 제공 = 청와대)
다음해인 2000년 10월 북미공동코뮤니케에서 “정전협정을 평화보장체계로 바꾸고 한국전쟁을 종식시키는 여러 방도가 있다는 견해에 같이한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북미정상회담을 눈앞에 두는 듯 했지만, 부시 대통령 당선으로 다시 무산됐다.

이후 북한은 평화협정 논의를 위해 미국을 핵으로 압박한다. 이에 따라 2005년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을 통해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한다는 내용이 명시됐고, 이행을 위한 2.13합의, 10.3합의 등이 진행된다.

그리고 2006년 10월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중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미국의 대북경제지원 참여” 등을 제안하면서, 2007년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한 10.4선언에 ‘종전선언’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 같은 평화협정을 위한 시도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모두 중단되거나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북미관계도 얼어붙었다. 그리고 핵개발이 압박수단이 된다는 것을 경험한 북한은 2차 핵실험 실행 등 핵개발을 본격화했다.

문재인 정부, 평화협정 전환 재시동

문재인 대통령은 7월 6일 G20 정상회담으로 방문한 독일에서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대해 발언하며 “평화협정 체결”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이른바 ‘베를린 독트린’을 통해 단지 평화 체제가 아닌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추진하겠다고 구체적으로 밝혔으며, 이는 역대 대통령 중 처음이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 계승,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을 위한 한반도 비핵화 추구,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신 경제지도 구상 그리고 정치, 군사적 상황과 분리한 비정치적 남북 교류협력 사업 추진”을 5대 원칙으로 내세웠다.

이와 함께 북한도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의지를 드러냈다. 

<아사히신문> 7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독일 G20 정상회의 기간에 재외공관에 보낸 긴급 지령문을 통해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담판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권이 (통일 과업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면서도 여전히 그 실현 수단을 핵개발로 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어 북한은 문 대통령이 베를린 구상에서 밝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비판하면서, "문 대통령의 비핵화 발언은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이 아니라 북한의 핵 폐기를 유도하고 압박하는 데 우선적 관심과 목적이 있는 것"이라며, “근본적인 정책전환, 입장전환이 없다면 그 어떤 언약도 새로운 실천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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