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로 가는 길 - 호인수]

고해소 앞에서 신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왕기리 기자

나는 4대째, 이른바 태중교우다. 내 발로 성당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감히 그리스도의 사람, 그중에도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을 무엇보다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밥이다, 통째로 줄 테니 먹고 살라’(요한 6,51)는 성체성사와 ‘꼬치꼬치 묻거나 따지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이’(요한 8,11)는 고해성사다. 굳이 하나만 꼽으라면 후자다. 우둔하게도 나이를 먹은 후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고해성사를 본 적이 평생에 몇 번 있었다. 그때 느꼈던 홀가분함과 해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독자들 가운데는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개별적인 고해성사(더군다나 증명서를 발행해서 의무감을 더하는 판공성사)가 부담스러워 성당에 못 가겠다는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톨릭 교회만의 보물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멍에가 되어 소위 냉담자 양산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나는 이미 10년 전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고해성사에 대한 사목적 제안’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바 있다. 우리 성직자들이 개별 고백을 기피하는 신자들을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질책하지 말자, 개별적으로 사제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고해 바치는 행위가 시쳇말로 쪽팔려서 싫다는 신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자는 취지였다. 나의 사목활동 경험에 의하면 신자들을 억지로 고해소에 끌어들이려 애써 봐야 되지도 않거니와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대부분 정작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로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개신교 신학자 하비 콕스의 말이 새롭게 들린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고해성사를 제도화한 것이 사람들이 자기 양심을 탐색하고 용서받는 데 따르는 위안을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사람들을 자신의 영적 권력 아래 더 확실하게 묶어 두려는 목적도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 많은 욕망은 더 많은 죄를 의미하고, 더 많은 죄는 더 많은 고백을 의미하며, 더 많은 고백은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심화하고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신이 된 시장", 274쪽, 문예출판사) 가톨릭 교회와 고해성사를 폄훼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체제 보장과 권력 강화에 고해성사를 일정 부분 이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견해가 있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무지의 소치다.

고해소는 단죄나 치죄의 재판정이 아니다. 사제는 판사가 아니다. 회개와 용서와 화해라는 고해성사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자들이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제시할 필요가 있다. 선택은 전적으로 신자들의 몫이다. 전례의 무조건적인 답습은 안일 무사할 수는 있겠으나 바람직한 사목자의 자세는 아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고해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개별 고백이 내게는 더없는 은총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지금까지 저의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제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더 공부해서 뵙겠습니다. -호인수 드림-)

호인수 신부의 '열린 교회로 가는 길' 시리즈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빛두레>에 실린 다음 주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전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게재를 허락해 주신 호인수 신부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원로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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