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동건]

연중 제6주일은 세계 병자의 날이다.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님이 첫 발현한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제정하셨다. 서울성모병원 1층 로비에는 거대한 성모님이 있다. 성모님이 많은 이를 치유하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모셔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과연 성모병원들이 그러한 길을 가고 있는지 되짚어 묻는다면 글쎄, 다른 병원과 뭐가 다른지 주장하기 애매한 부분들이 많은 듯하다. 그냥 종교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건, 교육, 사회복지, 학교, 청소년과 같이 교회가 국가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사업들은 모두 공공재다. 공동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교회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하지만 교회의 관점에서 사업이 사목이 되려면 지금의 모습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흐름을 거부하지 말고 더욱 성장하고 깨끗하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병철의 책 "투명사회"에서는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며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정립하고 관철한다고 알려 주고 있다. 

이 시대의 흐름 가운데 투명성이 진리인 듯 비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투명사회"는 서두에서 이 시대의 흐름이 투명성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자본을 향한 감시와 견제 그리고 머리를 맞댄 성찰과 고민이 없다면 자본이 무서운 속도로 공동선을 훼손하게 되는 것을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개인이나 조직도 비밀이나 상처가 있고 자신들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투명사회"의 논점이다. 그러나 이미 이 시대는 투명성을 요구하고 이런 요구를 공격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교회는 더더욱 깊은 늪으로 빠져 점점 시대의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시대에 맞는 접점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런 논점에서 2009년 체결된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와 노동조합이 맺은 협약서는 이 시대에 가톨릭이 적응해야 되는 중요한 접점을 제시한다. 이 문건은 미국 주교회의 국내 정의와 인간발전위원장 윌리엄 머피 주교가 설명했는데, 교회와 노조는 “합의 하에 경영자는 기존의 반-노조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 노동조합은 공개적으로 가톨릭의료기관을 공격하지 않는 데 동의한다.”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로비에 있는 성모상. ⓒ왕기리 기자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기"(가톨릭 의료기관과 노동조합을 위한 안내와 선택), 이 문건은 미국 주교회의 국내정책위원회 전 위원장 추기경, 미국 주교회의 국내정의와 인간발전위원장 주교, 브루클린 교구의 보좌주교, 미국 주교회의 정의평화와 인간발전위원회 상임이사, 가톨릭 의료기관장, 주요한 가톨릭의료시스템 대표자, 여자수도자장상연합 대표와 미국노동자총연맹 산별조합회의(AFL-CIO) 대표, 서비스종사자 국제연맹(SEIU) 보건 의장 들이 10년에 걸쳐 솔직한 대화를 통해 만든 15페이지 분량의 문건이다.)

세상엔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 상처가 때론 권력과 욕망의 의지로 변질되어 세상을 더욱 상처 주는 순환 고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세상 한복판에서 상처를 치유하고자 있는 것이 교회일 것이다. 이런 세상을 떠나 있어도, 그냥 세상과 어우러져 똑같이 상처 주는 존재로 변질되는 것도 아닌, 그곳에서 치유하는 모습이 교회의 사명일 것이다. 그래서 병자의 날 복음 마르코 1장 40절에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나병 환자의 믿음이 지금도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시대는 단순히 병을 고쳐 치유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좀 더 지혜롭게 세상의 구조 가운데 치유하는, 그래서 사람을 돌보고 세상을 선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사업을 해야 하는 현장 신부님들은 공무원들과 잘 지내야 되고 직원들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되며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때론 직장인처럼, 때론 사장처럼, 때론 노동자처럼, 그 안에 사목은 어디 있는지 찾는다는 것을 늘 도전받으며 지낸다. 그래도 정부나 지자체는 사제들이 나름 투명하고 성실하니까 교회가 사업을 맡아 주길 바란다고 한다.

하지만 사목이 사업으로 흘러가는 구조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어느 순간 공공재 현장에서 사목 대상인 사람은 안 보이고 사업만 추진해야 되는 도구로 전락한 듯한 자기 모습을 발견한 사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사제는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의 구조와도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성실해야 되고 지혜로워야 한다. 하지만 선행되는 모든 조건보다 사회와 조직에서 상처받은 자신이 치유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사제가 어디 있느냐의 관점이 아닌, 그곳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지 사업을 하고 있는지의 관점을 찾는 게 될 것이다.

사람을 봐야 된다. 사람을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치유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많은 도움과 지원을 하였다 해도, 스스로 그리고 옆에 있는 이와 세상을 치유하지 못하는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외면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스스로 치유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존재는 투명성으로 나아가기 두려울 것이다. 

이제 치유의 대상은 세상에서 교회로 전환되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처음부터 교회의 모습이었을지 모르겠다. 병자의 날 복음에서 예수님은 외딴곳에 머무르신다. 이 치유의 시간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승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한다. 예수님께 다가온 어떤 나병 환자가 교회다. 교회에게 믿음을 고백하길 원하지 말고 이젠 교회가 예수님께 다가가 믿음을 고백하자. 세상 어딘가 예수님께서 숨겨 두신 치유의 답이 있을 것이다. 치유의 세상을 향해 노력해 보자.

김동건 신부(바오로)

인천교구 도화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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