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한 지인이 "영신수련"이란 책에 '중용'(中庸, indifference)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그 뜻을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이란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쓴 일종의 ‘피정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될 것입니다. 이 책에 관해서는 “영신수련이 뭔가요?”를 함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영신수련"에서 등장하는 '중용'이란 개념은 사서오경의 한 경전인 중용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철학에서 다루는 중용은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는 최적이나 적당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 "영신수련"의 중용은 외줄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설명해 볼 수 있겠습니다. 두 가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채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중용이란 말을 차용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영어로 indifference 라고 하니, 쉽게 무관심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무질서하게”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연함”이 좀 더 의미를 잘 살린 해석으로 보입니다.

"영신수련"의 중용은 외줄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설명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진 출처 = Flickr)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분께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 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으로 더욱더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한다."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

영신수련에서 '중용'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된 창조 목적, 즉, 소명에 관한 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의 창조 목적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향해 가는 여정에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며 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관계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데 도움이 되면 되는 만큼, 사람은 그것을 활용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만, 나는 내게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을 두고 어떤 것을 원한다 혹은 아니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건들과 나를 둘러싼 사물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기준은 그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냐 아니냐 입니다.

그럼에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건강하게 존경받으면서 쓰고 싶은 대로 돈을 쓰며 오래 살고 싶다고 바랍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즉, 중용을 지키려 하고, 초연함을 유지합니다. 나의 구원을 향해 가는 길에 내가 본능적으로 기대고 싶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마음을 견지합니다.

결국,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을 통해 제안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바라는 탐욕에 맞서는 것이 우리 구원에 필요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중용'이나 '초연함'이라 표현하였지만, 오히려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단명으로 사는 것에 대해 좀 더 강세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그렇게 불행해 보이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며, 그의 삶은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열리고, 용기 있는 마음만이 나를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뜻에 따르도록 해 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들’ 앞에 붙는 수식어를 불행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용/초연함이라 하겠습니다.

사족: 

“나의 일이 하느님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도 권해 드립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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