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인간 존엄이 되는 사회를 위해", 정부, 정치권도 의지 밝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가 헌법 용어 가운데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자는 “근로에서 노동으로” 캠페인을 하고 있다.

노사위는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내년 6월 개헌에 이 내용이 반영되도록 사회의 인식 변화를 꾀하는 한편, 정부에 정식 청원 등 다른 방법도 주교회의 노동소모임 등을 통해 논의할 예정이다.

헌법 32조와 33조는 각각 국민의 노동권과 노동자 권리를 밝히고 있는데, 9개의 조항에서 모두 “근로, 근로자”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위원장 정수용 신부는 “노동이라는 말을 쓸 때, 많은 이들이 이념적인 가치가 묻어있는 부정적인 말로 생각한다”며, “법은 시대의 생각이나 사고를 반영한다. ‘노동’이 법적인 용어로 정해진다면 사회적으로 거부감이 줄어들고 노동에 대한 중립적 가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상위법에서 규정하기를 바란다”고 캠페인 이유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밝혔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회와 문서에서 늘 "노동"을 쓰고 있다.

정 신부는 해방 뒤에 노동이라는 말 대신 ‘근로’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다른 체제를 가진 북한이 주로 사용한다는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냉전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상황에서 굳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회피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선수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법률 용어로 ‘노동’과 ‘노동자’가 적절함에도 1948년 헌법 제정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체제적 대립 상황에서 ‘근로’와 ‘근로자’라는 용어가 사용됐다”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 우월성이 명확하게 증명된 이 시점에서 노동과 노동자를 헌법상 용어로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그는 “헌법 32조 1항 ‘근로의 권리’를 ‘일할 권리’로 바꾸고 2항의 ‘근로 의무’를 삭제하며, 3항에서는 노동조건 법정주의를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공동으로 결정하는 원칙을 선언하자”고 했다.

서울대교구 노사위가 만든 캠페인 스티커. (자료 제공 = 서울 노사위)

'노동'은 사회경제적 실존을 넘어 철학과 신학, 인간 존엄에 접근하는 첫걸음

정수용 신부는 “근로와 노동이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근로라는 말은 근면하게 노동한다는 뜻으로 노동을 열심히, 근면하게 해야 한다는 윤리성을 포함하고 있고, 이는 노동을 시키는 이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표시는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결정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형성한다.” ('노동하는 인간',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정 신부는 교회에서는 문헌과 교리, 용어에 모두 ‘노동’을 쓰고 있고, 이는 “노동이 인간 자신을 실현하고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는 행위, 세상이 보다 아름답고 선해지는 방향으로 가꿔 가는 하느님 창조사업의 연속이자 그 동반자가 된다고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인간 노동에 대한 이해는 고용한 이들의 강요, 강제의 의미가 담긴 ‘근로’를 통해서는 온전히 이해하고 실현하기 힘들다면서, “노동은 생산 수단이자 임금을 목적으로 하지만 단순히 사회, 경제적 관점뿐 아니라 인간적 차원이 담겨 있다. 인간 실존에 노동이 어떤 의미인지 철학적,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정 신부는 지금까지 IMF 등 여러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의 위기는 곧 인간 삶의 총체적 위기라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지만, 여전히 인간적 노동이 생소한 것은 이미 우리 인간이 자본으로부터 소외됐다는 방증이라며, “결국 노동의 가치를 왜곡해 온 우리의 문화가 우리 자신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는 셈”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또 그는 “노동의 본질을 바로 볼 때,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이나 기술혁신 사회에서도 노동과 인간 존엄의 가치를 잃지 않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신부는 개헌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캠페인을 통해 주변에 알리고, 제안할 생각이라며, “개인적으로는 노동운동계나 관련 시민사회계 안에서 더 확산되고, 더 많이 말하기 시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서울대교구 노사위는 1회성 행사보다는 일상적으로 캠페인을 이어갈 계획이라며, 이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제작한 스티커와 안내 자료를 보내 주겠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김영주 장관은 취임사에서 '근로자' 대신 '노동자'라는 말을 썼다. 그는 취임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노동자'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제공 = 고용노동부)

문재인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 등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꾸자”
국회에서도 관련법 발의

‘노동’과 ‘근로’라는 단어를 둘러싼 논의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19대 대선을 기점으로 개헌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서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는 제안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였던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낸 13개 개헌안에서 표현과 호칭 관련해, “‘신체장애자'는 '장애인', '여자'는 '여성', '근로자'는 '노동자'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또한 당시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선거운동 중 ‘노동헌장’을 발표하고 “헌법이 노동의 가치가 분명하게 확인되도록 개정돼야 한다”고 밝혔으며, 올해 9월 출범한 국회노동포럼의 ‘헌법33조위원회’ 대표를 맡았다. 5개 정당 의원 47명과 각계 인사가 참여한 ‘헌법33조위원회’는 창립선언을 통해 “현행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근로’를 ‘노동’으로 전환”을 비롯해 노동적폐 청산, 노동자 삶의 질 향상, 노사관계 전환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도 지난 8월 모든 법률에서 사용하는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일원화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박 의원은 ‘근로’라는 용어는 ‘근로정신대’에서 유래한 일제강점기의 유물이며, 국제노동기구는 물론 같은 한자권인 중국, 타이완, 일본 노동법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며, “‘근로’는 부지런하다는 뜻을 강조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사용자에게 종속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인사청문회에서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고 취임사에서도 ‘노동자’라는 용어를 강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올해 ‘노동존중특별시 서울’의 2단계 발전계획을 밝히면서, “미래를 위해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르게 불러야 한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대등한 개념이지만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종속된 개념이며, 노동자의 존엄을 복원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노동자의 이름을 제대로 명명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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