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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짠 들기름이 더 꼬숩다[부엌데기 밥상 통신 - 45]

더듬어 보니 신랑과 내가 부부 연을 맺은 지도 9년째다. 그동안 살면서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만났나 땅을 치며 후회를 하기도 하고, 죽기 살기로 물어뜯고 싸운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세월 동안 큰 사고(?) 없이 함께하고 있음이 놀랍다. 나는 내심 '저 사람은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났으면 진작 홀애비 됐을 거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나를 고마워하고 있겠지.' 했는데 어느날 내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신랑이 이런 식의 말을 했다.

"저는 결혼해서 살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게 됐어요. 이혼하는 사람, 자살하는 사람, 알콜 중독자, 미친 사람...."

그 말을 듣고 처음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되었다. 내 입장에선 저 사람이 문제였지만 저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문제였을 거라는 걸. 그런데도 내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보며 '너는 틀렸어. 그렇게 행동하지 마.' 하고 사사건건 반대할 때가 많았으니 안 그래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우리 신랑은 몹시 고통스러웠을 거다.

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어지간해서는 '노터치'다. 왜 저럴까 이해할 수 없어도 알아서 하겠거니 넘어간다. 특히나 우리 부부는 신혼 초에 물건 사는 문제로 많이 다투었는데 (신랑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으면 꼭 사야 하는 사람이고, 나는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는 주의다. 그래서 사자 말자 자꾸 부딪혔다.) 요새는 신랑이 무얼 사고 싶다고 하면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어차피 말린다고 제 고집 꺾을 사람도 아니고, 신랑 덕분에 들여온 물건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열어 주었던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미지의 세계에 몸을 맡기듯이 그냥 허용하고 마는 것이다.

최근에 산 물건은 멀리 네덜란드에서 물 건너온 수동식 기름 짜는 기계다. 기름 짜는 기계는 어마어마하게 비쌀 거라고 여겨서 엄두도 내지 않고 있었고, 그러니 집에서 기름을 짜 먹는다는 건 아예 상상조차 안 하고 살았는데 저 멀리 네덜란드 땅에 그런 놀라운 물건이 있었다니! 그것도 크기가 매우 작은 수동형으로 10만 원대에!

하지만 그리 탐탁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실물을 보지 않고 인터넷 정보만을 가지고 물건을 사게 되니까 그 성능이 영 미덥지 않았을 뿐더러, 가뜩이나 자질구레한 일거리가 넘치는 마당에 이젠 기름까지 짜 먹어야 한다는 게 싫어서 사지 말라고 반대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돌아보면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게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건 다 해 보고 살아야지, 괜히 내가 참견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자기가 샀으니 자기가 짜겠지. 기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면 다음부터는 물건 살 때 좀 더 신중해지겠지.'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신랑이 기름 짜는 광경. 작고 앙증맞은 물건이 신통방통하다는 듯한 얼굴로 다울이가 지켜보고 있다. ⓒ정청라

마침내 물건이 온 날, 신랑은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와도 같이 들뜬 표정이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말에 서둘러 상자를 뜯고 부품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며 조립을 한다고 수선을 떨더니 조립에 성공하자 다시 분해하여 부품을 끓는 물에 넣어 철저히 소독하여 말려 두었다. 그러고는 이내 들깨를 씻고 고르고.... (내가 부탁하는 일은 몇 번을 말해야 실행에 옮기는데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얼마나 재빠르게 해치우는지 모른다. 오, 놀라워라, '자발성'의 위력!) 그런 모습을 심드렁하게 지켜보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덩달아 신이 났다. 아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자기들도 해 보고 싶다고 덤벼들다가 혼나고 다나는 콩알 만한 부품 하나를 갖고 놀다가 잃어버리고....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부품을 찾아 조립을 마치고 생 들기름 짜기 시연에 들어갔다. 신랑이 손잡이를 돌리고 다울이가 깔대기 안으로 들깨를 보충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다랑이는 다나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지킴이 역할을 맡기로 했다. 이렇게 역할 분담까지 확실히 하고 시연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다랑이와 다나가 들깨를 집어 먹고, 먹다가 마구 흘리고, 다울이는 다랑이를 혼내고, 혼내다가 싸우고, 그 틈에 다나가 예열을 위한 램프의 불꽃을 꺼뜨려서 작동이 중단되고... 아사리 난장판이란 이런 건가 싶을 만큼 정신이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똑똑 주르르 흘러내리는 기름 방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와, 기름이 나온다!"

"꼭 쉬 싸고 똥 싸는 것 같다. 히히히."

"아빠, 이거(깻묵) 먹어 봐도 돼?"

"먹어 봐."

"맛이 고소하다. 딱딱하니까 사탕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럼 들깨맛 똥사탕이라고 할까? 크크크."

똥 모양 깻묵 사탕 냠냠냠. 다나가 가장 맛있게 먹는다. ⓒ정청라

아이들은 기름 짜고 나온 깻묵을 맛있게도 먹었다. 사탕처럼 들고서 오독오독 씹어서 말이다. 하도 맛있게 먹길래 나도 한번 먹어 봤더니 식감이 거칠긴 해도 고소하게 씹히는 게 꽤 먹을 만했다. 보통의 경우 깻묵은 가축 사료로 쓰거나 거름으로 이용하기에 왠지 사람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께름칙함이 있었는데 막상 먹어 보니 께름칙해 할 까닭이 없을 것 같았다. 생 들기름을 짜면 들깨 600그램 정도에 들기름이 300그램 조금 못 되게 나오니까 전체 무게의 절반도 더 되는 찌꺼기가 버려지는 셈인데 그렇다면 낭비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껍질에 좋은 성분이 더 많을 텐데 말이다.

해서 남은 깻묵은 절구에 찧어 들깨가루로 보관해 두었다가 반찬이나 국에도 넣고 빵 반죽에도 넣었다. 특히 빵 반죽에 넣으면 빵에 감칠맛이 나면서 풍미도 더 좋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들기름도 먹고 들깨가루도 먹고, 일석이조 아닌가. 아니, 막 짜낸 들기름에 밥 비벼 먹는 그 맛은 또 어떻게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말인가.

진부한 결론이지만 언제나 과정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 풍성한 이야기와 맛을 선물한다. 번거롭고 시끄럽고 힘도 들고 시간도 들지만 그 길 안에 진정한 맛이 있다. 그런 뜻에서 이번에도 신랑에게 노터치 하길 참 잘했다.

"나도 기름 짜 주세요~" 하고 참깨와 달맞이꽃도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참깨 털면 참기름, 달맞이꽃 털면 달맞이꽃기름도 짜 봐야지.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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