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43]

우리 집 개 보들이가 엄마가 되었다. 마을 할머니들 말로는 개는 짝을 짓고 딱 두 달 만에 새끼를 낳는다는데 배는 진작부터 아주 무거워 보였기 때문에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개도 출산이 임박하면 몸이 무거운지 잘 움직이지도 않는구나. 얼마나 힘이 들까. 개도 새끼 낳을 때 많이 아프겠지? 첫 출산이라 모든 것이 낯설 텐데 잘 해낼 수 있을까?' 마치 내가 출산을 앞둔 것마냥 겁이 나고 떨렸다. 개들은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출산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을지 여러 모로 마음이 쓰였다. 보들이와 내가 집짐승과 주인의 관계를 넘어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존재"라는 동일한 처지로 엮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장의 동일함은 관심과 배려를 낳는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 보들이를 더 많이 쳐다보게 되고, 보들이가 나한테 뭔가 하소연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를 벅벅 긁으며 몹시 괴롭다는 듯이 말이다.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았더니 피를 잔뜩 빨아 먹어 몸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진드기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라 신랑을 불렀더니 알았다고만 하고 끝이다. 개똥이 많이 쌓였으니 치워야 할 것 같다고도 말했는데 듣는 척도 안 한다. 참다 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가뜩이나 몸도 무거운데 진드기까지 극성이니 얼마나 괴롭겠어요. 얼른 진드기부터 잡아 줘요. 그리고 새끼 낳기 전에 개똥도 싹 치워 줘야지."
"평소엔 개한테 관심도 없더니 요즘 들어 왜 그래요? 그렇게 걱정되면 청라 씨가 직접 하면 되잖아요."

남자는 모른다. 만삭에 이른 여인(여견?)의 심정을. 그래서 내가 하기로 했다. 괜한 실랑이를 할 게 아니라 당장 보들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이 최우선이 아니겠는가. 해서,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진드기를 보이는 족족 잡아서 죽였다. 보들이 털 사이에서 진드기를 뜯어내고 날카로운 돌로 눌러 툭! 또 툭! 툭툭툭! 진드기 몸이 툭 터지며 진득한 피가 나올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세상에, 이런 일까지 내가 해야 하다니. 눈을 질끈 감고 보들이가 수북하게 쌓아 놓은 똥도 치웠다. 내 새끼 똥 치우는 일만도 버거운데 개똥까지 내가 치워야 하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도망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더럽고 징그러운 일,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일.... 이런 일은 내가 안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보들이는 곧 엄마가 되니까. 만약 내가 보들이라면 누군가 이렇게 해 주길 간절히 바랐을 테니까. (나 또한 출산을 앞두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처럼 온 집안을 정돈하고 몸을 씻었다. 그래서 보들이에게도 그와 같은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마침내 줄곧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이틀째 되던 날 이른 새벽, 신랑이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한 나는 잠결에 크게 소리를 쳤다.

"보들이 새끼 낳았어요?"
"어!"

그 소리에 용수철 튀어오르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다울이도 후닥닥 따라 나왔다. 우린 조심스럽게 보들이 집 앞으로 갔는데 보들이가 새끼 네 마리를 품고 있는 게 보였다. 쉬지 않고 새끼들을 핥아 주면서....

"보들아 잘했다. 고생 많았어. 네 마리면 딱 좋지."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얼마 뒤에 다시 가 보았더니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조금 뒤엔 두 마리가 더 있었다. 그렇게 출산은 오후까지 계속되어 최종적으로 아홉 마리가 되었다. 한번에 아홉 마리라니, 게다가 끙끙거리는 소리 한 번 안 내고 담담하게! 아무리 생각해도 보들이가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 강아지 아홉 마리가 엄마한테 들러붙어 엄마 젖을 빨아 먹고 있다. 눈을 안 떴는데도 용케 어미 품을 파고드는 새끼들이 신기하다. ⓒ정청라

헌데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한 번에 하나씩만 낳고도 그렇게 애를 먹었는데 아홉 마리를 어떻게 키울까 싶었던 거다. 이 다음에 새끼들을 분양해야 할 텐데 그것도 걱정이고 당장 보들이를 잘 먹여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도 컸다. 강아지 탄생 소식에 오며 가며 강아지를 들여다본 동네 사람들이 다들 한 소리씩 했던 것이다.

"밥 잘 해 먹여야 써. 그래야 젖이 잘 나온께."
"젖 먹이믄 살이 쑥 빠져 블어. 먹고 싶은 대로 많이씩 줘."
"에미 밥 해 줄라믄 집이는 인자 죽어났다."
"뭐 혀. 얼른 미역국부터 낋여 줘. 개나 사람이나 똑같은 뱁이여."

그렇게 해서 강아지 구경할 틈도 없이 미역국을 끓여야만 했다. 개 주려고 끓이는 미역국이라니.... 기분이 참 묘했다. 해산한 딸을 돌보는 친정 엄마와 같은 마음이랄까? 국을 끓이는 내내 '이 미역국이 보들이 몸에 기운을 북돋아 젖이 잘 돌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다. 다나 낳고 젖이 모자라서 거의 6개월가량 고생을 했던 터라, 보들이만은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낳은 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승이나 사람이나 먹고 살고, 먹고 먹여 살리고.... 삶의 고갱이는 그것뿐인 것 같다.

이제 보들이 또한 살기 위해 먹는다기보다 먹여 살리기 위해 먹는 단계로 진입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보들이를 먹여 살려야만 한다. 때때로 진드기를 잡아 주고, 그때그때 똥도 치워 주면서 개 산후 도우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아홉 마리의 새 생명을 먹여 살리는 귀한 생명을 위해 내 생명을 헌납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처지를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속 깊이 이해할 수 없는 법, 나는 엄마를 살고 있기에 엄마 되는 존재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점점 더 낮은 자리로 나아가 기꺼이 밑거름이 되는 내 삶이 고달프긴 해도 자랑스럽다.

▲ 한꺼번에 아홉 마리 새끼를 낳은 보들이. 그리고 꼬물꼬물 강아지들.... 한여름 더위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