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40]

"여그서 풀 잔 뜯어 가야겄다, 우리 닭 주게...."
앞집 할머니가 우리 집 텃밭에서 풀을 한 움큼 뜯으며 말씀하셨다.
"아니, 왜 여기서 풀을 뜯어 가세요? 댁에는 풀도 없어요?"
"읇어. 다 약 쳤어."
"닭 줄 풀도 안 남기고 약 치셨어요? 풀이 웬수도 아니고 도대체 왜...."
"웬수여, 풀은."

할머니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풀을 웬수라 했다. 풀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논둑 밭둑은 물론 집 둘레, 담벼락에 난 풀에까지 제초제를 뿌릴까? 농사짓는 데 걸림돌이 되는 풀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헌데 풀이 보이는 족족, 설사 그것이 자기 집 농작물이 자라는 데 아무런 영향이 없는 지대의 풀이라 해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걸 보면 이건 지독한 결벽증 수준이 아닌가 싶다.

사실 원수의 정체를 낱낱히 밝혀 보면 약초이자 화초가 대부분이다. 민들레, 왕고들빼기, 개망초, 우슬초, 쑥, 익모초, 달개비, 명아주... 텃밭 농사가 변변치 않은 우리 집에서는 그것들에 의지해 밥상을 차려낼 때가 많다. 재배 채소에 비해 씁쓸하고 뻣뻣한 느낌은 있어도 먹어 보면 먹을 만하고 먹다 보면 익숙해진다. 화분에 담아 따로 기르거나 꽃씨를 심어 가꾸지 않아도 때 되면 절로 꽃 구경까지 시켜 주니 얼마나 기특한지! 그뿐인가. 책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면 심고 돌보지 않아도 그냥 나는 것들이 약성도 뛰어나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수 대접을 받는 온갖 풀들.... 나는 이름도 없이 싸잡아 풀이라 불리며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풀들이 남 같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다. 제초제 맞고 흉측한 모습으로 서 있는 풀들 곁을 지날 때면 이것이 무단학살과 무엇이 다른가 싶어 소름이 돋기도 한다. 항상 일손이 모자란 농촌 현실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건 좀....

▲ 불미나리. 때깔이 참 곱다. 데치면 보랏빛 물이 생기는데 얼마나 어여쁜지 그 물에 손을 꼭 담가 보곤 한다. ⓒ정청라

얼마 전에 마을에 한바탕 큰 소동이 있었다. 마을 어귀 큰 논 수로 근처에 불미나리 군락지가 있는데,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걸 뜯은 거다.

"하도 시퍼러니 맛있어 보이길래 말이여. 텔레비서 봉께 불미나리가 약이라 그라더만. 설마 거그까지 약을 쳤을까 했제."

헌데 다음날, 그 논 주인 할아버지가 불미나리에 약을 쳤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미나리를 먹은 할머니는 어쩐지 아랫배가 아프다며 서둘러 병원에 가셨다. 마을 사람들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왜 쓸데없이 수로에까지 약을 치냐' 대 '미나리 한 다발 사 먹고 말지 왜 아무데서나 뜯어 먹냐'. 만약 약 때문에 큰 사고가 생긴 경우 책임 여부를 어떻게 따져야 하느냐에까지 걱정이 이어지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병원에 간 할머니는 큰 탈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속이 미슥거리거나 토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정말 괜찮을까?) 할머니는 찜찜해서 죽는 줄 알았다며 다시는 수로 근처 미나리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고, 그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 다시 한번 '자나 깨나 약친 자리 조심, 시퍼런 미나리도 다시 보자!'란 교훈을 얻게 되었다. (미나리는 제초제를 쳐도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시퍼래도 다시 보아야 한다.)

그 일이 있고 다음 날, 나는 아이들과 함께 논에 갔다. 몇 해 전에 신랑이 우리 논 윗배미에 불미나리를 몇 포기 캐다 옮겨 심어 놓았는데, 그게 번져서 지금은 미나리꽝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미나리 소동으로 불미나리가 더욱 먹고 싶어진 나는 그곳에서 미나리를 한 보따리 했다. 뿐만 아니라 논둑에 있는 머위 군락지에서 머윗대도 한 다발 하고, 논둑에서 쑥도 베었다. 그렇게 해서 가지고 간 손가방을 잔뜩 채우고 집에 돌아와 쑥은 쑥떡 하려고 말리고, 머윗대는 손질(데쳐서 껍질 벗기기)해서 카레에 넣고, 미나리는 데쳐서 나물로 무쳤다. 미나리가 뻣뻣하고 질겨서 먹기에 괜찮을까 반신반의하면서 말이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말이다, 미나리 나물이 기가 막혔다, 올해 내가 무쳐 먹은 나물 중에 단연 최고라고 할 맛이었다.(된장, 참기름, 매실효소, 감식초 적당히 넣고 무쳤는데 생각보다 질기지도 않고 씹으면 씹을수록 향긋하고 고소한 것이 고기보다 맛있는 고기 같았다. 오징어 하나 안 들어 있는데도 어떻게 고기 맛이 나지?) 너무 맛있어서 연달아 세 번을 무쳐 먹고 한 번은 불미나리 부침개를 해 먹었는데 그것 또한 별미였다. 먼 데서 특별한 약이나 음식 찾을 거 없이 미나리꽝 하나만 가지면 누릴 수 있는 이 행복!

왜 시골 사람들이 행복을 곁에 두고도 거기에 약칠을 하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조금만 다른 눈으로 새롭게 볼 수 있다면, 웬수라고 낙인 찍지 않고 친구로 삼는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낙원을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텐데... 집 앞에 있는 불미나리를 두고 마트에 가서 미나리를 사 먹는 일은 없을 텐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은 에덴동산으로 대표되는 낙원에서 추방당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낙원을 부순 거다. 낙원이 낙원인 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아무쪼록 더 늦기 전에 낙원을 낙원으로 알아보는 눈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온갖 풀들이 어우러져 보다 생동감 있는 논과 밭이 되기를! 거기에서 안심하고 맛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 미나리 나물에 칼국수게티, 그리고 남은 찬밥으로 심플 김밥. 미나리 나물은 각종 국수 요리에 고명으로 얹어 먹어도 잘 어울린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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