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42]

단비가 내렸다. '행여나 온다고 하고 안 오면 어쩌지? 찔끔 오다 마는 거 아니야?' 하는 온갖 걱정을 무색케 하며 짜락짜락 쏟아졌다. 비만 오면 걱정이 없겠다 했으니 정말 걱정이 없구나 했는데 이게 웬일, 이번엔 두드러기 사태다. 낮잠 자고 일어난 다랑이가 "엄마, 너무 가려워." 하면서 이마를 득득 긁으며 일어나 나오길래 쓰윽 봤더니 이마에 커다랗게 모기 물린 자국 같은 게 보이는 게 아닌가. 곧이어 배를 긁기에 옷을 들춰 보니 배 여러 곳도 벌겋게 부어오른 채 모기 물린 자국 같은 게 잔뜩 올라와 있었다. 마치 무지막지한 모기떼에게 흠씬 피를 빨린 것 같은 처참한 상황이랄까?

해서, 처음엔 모기나 개미한테 물린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와는 양상이 달랐다. 가려운 부위가 수시로 달라지며 여기가 가려웠다 저기가 가려웠다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이다. 재작년에 다울이가 말벌에 쏘인 적이 있는데 그때 다울이 몸에서 보인 반응(몸이 붓고 미열이 난다. 두드러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유동적으로 옮겨 다닌다)과 아주 흡사했다. 그렇다면 강한 독에 대한 몸의 방어 반응이라는 건데 대체 원인은 뭐지?

나는 순식간에 탐정 모드로 돌입, 두드러기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먼저 뭐 잘못 먹은 것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점심에 무얼 먹었지? 밥, 된장국, 김치, 푸성귀 샐러드... 아무리 생각해도 별 다를 게 없었다. 아침 메뉴와 전날 저녁 메뉴까지 추적해 보고 혹시나 맛이 간 음식은 없었나 돌아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만약 음식이 원인이라면 함께 밥을 먹은 다울이나 다나에게도 증상이 나올 텐데 두 아이는 멀쩡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말 벌한테 쏘이기라도 했나?

"다랑아, 혹시 벌한테 쏘이거나 벌레한테 물리거나 한 적 있어?"
"어, 이빨이 뾰족뾰족한 간지럼 벌레가 나를 콱 물었어. 내가 엄마 집에 도망갈라고 했는데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막 괴롭히고 바늘로 찌르고. 남자컷(수컷)이랑 여자컷(암컷)이 다 나와서 내 몸에 달라붙었는데...."

다랑이는 괴물처럼 등장한 간지럼 벌레 얘기를 끝도 없이 생생하게 전달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아직 다랑이는 꿈과 현실 세계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요정의 시간'을 살고 있으므로. 그리고 만약 벌한테 쏘이기라도 했다면 아프다고 난리가 났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원인이 있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품고 두드러기 원인과 치료법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던 나는 원인을 아는 두드러기보다 원인을 모르는 두드러기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대체로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약화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나는 무릎을 치며 '아하!' 했다. 그거였구나. 결국 원인은 애.정.결.핍!

사실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다랑이를 야단치는 일이 잦았다. 다나를 등에 업고 일을 하고 있으면 "엄마는 왜 다나만 업어 줘? 나도 어부바해 줘." 하며 눈을 흘기는 다랑이, 다나가 내 품에 안겨 있으면 은근슬쩍 발로 밀어 버리고 내 품을 차지하며 "엄마, 엄마" 혀 짧은 소리로 아기 흉내를 내는 다랑이, 자기 아기 때 사진을 들고 다니며 "너무 귀엽다, 나 다시 아기 되고 싶어. 아기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하고 집요하게 묻는 다랑이.... 그런 다랑이가 못마땅하기만 해서 자꾸 으르렁거리며 다그치기만 했다.

"야, 이제 그만 좀 해. 너는 아기가 아니잖아. 앞을 보고 쑥쑥 자라야지 왜 자꾸 뒤를 보냐고... 그동안은 엄마도 참을 만큼 참고 받아 줄 만큼 받아 줬어.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네가 더 어리광쟁이가 되는 것 같아서 안 되겠어. 앞으로는 어부바도 안 해 줄 거고, 아기처럼 말하면 네 말도 안 들어 줄 거야."

나는 아주 단호하고 엄격한 표정으로 다랑이를 대했다. 그래야지 못된 버릇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애를 괴로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의 차가운 말투와 딱딱한 표정, 엄한 행동이 다랑이에겐 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약해진 상태라 자꾸만 내 품에 들어와 치대는 거였는데 그런 아이를 보듬어 안아 주기보다 으름장을 놓아 벌벌 떨게 했으니... 돌아보니 나는 또 '내가 옳다' 또는 '나도 할 만큼 했으니 더는 못 참는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를 생명의 결대로 대하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다루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아이고, 이런 무지막지한 엄마 같으니라고!!!)

두드러기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냥하고 부드러운 엄마가 되기로 했다. 자꾸자꾸 안아 주고, 다랑이 얘길 흥미진진한 얼굴로 들어 주고, 말끝마다 '우리 이쁜이~'라고 불러 주고, 다랑이만을 위한 노래와 이야기도 만들어 불러 주고, 날마다 탱자 물로 목욕놀이를 시키며 온갖 부탁을 다 들어주고.... 그러자 다시금 자신을 사랑받는 존재로 느끼기 시작한 다랑이가 행복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나에게 속삭였다.

"엄마, 엄마가 예쁘게 말하니까 꼭 이모 같아. 내가 크면 엄마한테 빵 사 줄 거야. 근데 이거 비밀이야, 비밀!"

▲ '너를 위해 준비했어'라는 멘트에 헤벌레 웃으며 팥죽을 먹는 다랑이. 이때만 해도 눈이 많이 부었다. ⓒ정청라

사실 나도 놀랐다. 내 속에도 이렇게 부드럽고 친절한 얼굴이 있었나? 내가 이 정도로 인내심 있게 다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나? 물론 불쑥불쑥 우악스런 얼굴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도 있었지만 꽤 잘 참아내며 다랑이를 보살폈다. 내 감정 내 기분보다 아픈 아이가 먼저니까. 아이가 아플 땐 나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너를 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닫게 되니까. 그래서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내 그릇을 넓히는 시간이라 여기며 내 것을 다 단념하고 아이를 위해 다 바치게 되었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냐고 하는데, 아이는 기어이 엄마를 변하게 하고야 마는 것이다.

밥상 또한 마찬가지다. 다랑이를 위해 밥 대신 죽을 쒔다. 소화 잘되고 해독도 되라고 하루는 녹두죽, 하루는 팥죽을 쒀서 먹였다.(내가 죽을 끓이는 방식은 이렇다. 불려서 싹을 틔운 쌀에 녹두나 팥을 듬뿍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 압력솥에 밥을 짓는다. 그걸 도깨비 방망이로 들들 갈아서 입자가 곱게 갈리면 거기에 물을 더 넣고 적당한 묽기로 끓이는 거다. 이렇게 하면 현미로도 부드러운 죽을 끓일 수 있다.)

죽을 끓이며 나는 생각했다. 들들 갈아 으깨지고 푹 끓여 뭉개지는 게 곡식 낟알만은 아닐 거라고... 나의 아집과 판단, 뻣뻣함과 완고함도 함께 으깨지고 뭉개지고 있을 거라고... 한마디로 온전히 내 것(내 감정, 내 시간, 내 생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다 포기할 때 죽이 죽다워지는 게 아닐까? 죽이 뭔가. 죽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연약한 생명을 위한 특별음식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 온몸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너그럽게, 한없이 온화하게. 그러니 낟알은 죽기를 각오하고 제 존재를 박살내야 하는 것이다. 제 성질 죽이지 않고 누군가를 살릴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죽의 뜻이 참 높고도 높다. 내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어찌 죽어야 죽이 되는 이치를 알 수 있었을까. 아무튼 나는 이번 일로 제대로 배웠다. 아이에게 늘 죽만 먹여서는 안 되겠지만 때로는 부드러운 죽이 되어 아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덧.
다랑이의 안부를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두드러기 발생 이틀째 되는 날은 얼굴이 퉁퉁 부어 선풍기 아줌마처럼 보일 정도로 증상이 심했는데 사흘째부터는 붓기가 빠지고 가려움도 한풀 꺾이기 시작했답니다. 나흘째인 오늘은 모기 물려서 가려운 거 말고는 특별한 증상 없이 멀쩡하게 까불고 장난치는 다랑이를 만날 수가 있고요. 그동안 땀이 나야 안 간지럽다는 말을 듣고 동생이 땀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이 놀아 준 다울이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다울이가 책도 무진장 읽어 줬어요~) 오빠에게 엄마 품을 양보하고 수난의 시간을 견뎌낸 다나에게도, 그리고 좋은 약을 제공해 준 우리 마을 탱자나무님에게도, 모두 고마워요. ^^

▲ 우여곡절 끝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울다가 웃다가 좋아하다 미워하다 하면서 뒤섞여서 자라는 세 아이들.... 내게 있어 심신을 단련시켜 주는 스승이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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