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오캄의 정치존재론 읽기 5

항상 불안하다. 무엇인가 남들과 다른 것 같다. 남들과 다른 자신이 불안하다. 기준에서 벗어난 것 같다. 벗어났다는 것이 두려움이 된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심리를 잘 활용했다. 행복은 이것이다. 행복의 기준에 미달했다. 빨리 기준을 따라라. 그래야 행복해진다. 이런 권력자들의 요구에 불안한 민중들은 작은 기준의 틀 속에 자신의 존재를 집어넣었다. 기준에서 떨어져서 지금 자신이 불행한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에 더욱더 집중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강요된 기준은 의심 없이 따라야하는 관습이 된다. 중세 후기 유럽의 곳곳은 이런 관습으로 가득했다. 흑사병과 몽골군의 침공 그리고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민중들은 더욱더 불안해 했다.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종교적 관습을 따랐다. 곳곳에 기복을 위한 종교적 행위가 이어졌다. 불안이 커지면 이런 관습은 민중들에게 더욱더 간절한 것이 되었다.

▲ 장 제르송.(1363-1429) 피에르 다이이의 제자다. (이미지 출처 = nl.wikipedia.org)
이에 오캄에 의하여 견고해진 유명론자들은 혐한 세상 가운데 나약해지고 불안해 하는 민중을 기만하는 이런 과도한 종교적 행위에 격분하였다, 제르송(1363-1429)은 '그저 인간의 환상과 상상 속 우울'에서 나온 것을 이용하는 교회 권력자들의 그 잔혹함과 야심에 격분했다. 불안한 민중에게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또 무엇을 하면 구원이 된다는 식의 협박 같은 이야기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기만적 행위에 제르송의 스승이며, 오캄의 영향을 받은 유명론자인 피에르 다이이(1350-1420)는 한 편의 글을 남긴다. 바로 1409년경에 쓴 '교회의 개혁에 대하여'다. 라틴어 제목이 'De Reformatione Ecclesiae'(데 레포르마시오네 에클레시애)다. 지금 개신교에서 쓰는 '종교개혁', 즉 라틴어 reformatio란 명칭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아직 루터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글에서 볼 수 있다.

다이이는 오캄과 마르실리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유명론이란 존재론적 입장과 함께 유명론의 배경이 된 정치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오캄과 마르실리오 그리고 다이이는 정치존재론의 장에서 서로 유사한 화두를 가지고 고민한 선후배들이다. 다이이에게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성직자와 교회 권력자의 추종자들이 모이는 곳은 절대 아니며, 교회 권력자들이 본질을 이루는 곳도 아니다. 개별 신자들이 모여서 이룬 것이 교회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공유물이다. 다이이는 교회를 라틴어로 공유물을 의미하는 ‘respublica’(레스푸블리카)라 불렀다. 마치 국가가 공화국, 즉 공중의 공유물이듯이 교회도 신자의 공유물이라 보았다. 또한 신자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신은 모든 개별적 인간들에게 이성을 허락하였으며, 그 이성이 사회의 여러 결단에 있어서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공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신자의 이성, 그 이성의 힘을 믿었고, 그 신자의 합리적 선택이 가장 잘 발현되는 교회 정치의 수단이 공의회라 믿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이후 그의 제자 제르송에게로 이어진다.

▲ 피에르 다이이.(1350-1420) 프랑스 추기경이자 신학자, 철학자, 파리대학 총장, 주교, 교황특사였다. 그는 오캄의 유명론 사상을 누구보다 강력히 실천에 옮겼다. (이미지 출처 = de.wikipedia.org)
다이이와 제르송은 당시 교회권력이 이성적 사유를 무력하게 하는 공포 중심의 신앙, 즉 이것이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식의 공포에 근거한 신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았다. 교회권력자들이 만든 구원의 기준에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조바심과 공포는 민중의 이성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무력해진 민중을 교회권력자는 쉽게 이용했다. 다이이와 제르송은 이러한 모습에 분노했다. 교회의 희망은 고민하고 궁리하는 깨인 신자여야 했다. 다이이와 제르송은 신자의 이성을 어둡게 하고 자신들의 거짓말로 진정한 교회와 신자를 조롱하는 교회 권력자들의 타락을 청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개혁이었다.

다이이와 제르송뿐 아니라, 오캄의 정신을 이어가던 가브리엘 빌(1420/25-95) 역시 이러한 분노에 한몫을 했다. 빌은 인간이 하느님이 직접 준 능력에 충실할 때, 하느님 역시 그 최선을 다한 자에게 적정한 공로(meritum de condigno)를 인정해 준다 생각했다. 빌에게도 신자는 그저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으로 자기 본질에 충실해야 했다.

오캄 유명론의 영향 가운데 많은 이들은 개인이 모여서 국가가 되고 교회가 된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다이이와 같이 교회는 ‘신자의 모임’이 된다, 교회가 있어 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신자들이 있어야 교회가 가능하다. 교회 권력자가 교회의 중심이며, 본질인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 국가의 중심이며 본질이 아니듯이 말이다. 신자들, 평범한 신자들이 교회의 중심이고 본질이다. 신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수많은 ‘나’의 모임,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된다. 그 모임 속 ‘나’란 존재는 그저 변두리 초라한 무력자가 아니다. 중심이다. 본질이다. 참된 ‘교회의 개혁’은 ‘나의 개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 그럴 충분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시 받은 존재가 아니다. 서로 다른 ‘나’들이 모여 서로의 이성으로 공동의 주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낼 수 있다. 그 공동의 뜻이 국가에선 국회 등을 거쳐 국가의 나아갈 길이 되고, 교회에선 공의회를 거쳐 교회의 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신자는 그저 멍하니 명령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구원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잘못된 교회 권력자들이 만든 기준 속에서 불안해 하는 신자들은 자신과 교회의 희망이 될 수 없다. 깨어 있는 고민하는 신자가 자신과 교회의 희망이 된다. 교회는 ‘신자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쁜 권력자가 고개 들지 못하도록 능동적으로 지켜보자. 교회의 개혁을 정말 원한다면, 착한 권력자의 착한 명령을 기다리기 전에 나의 삶과 생각의 개혁을 통하여 당당히 자신의 뜻을 말하는 신앙, 그 신앙이 교회 개혁의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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