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오캄의 정치학 읽기 3

많은 철학과 신학의 논쟁들도, 그것이 아무리 이해가 힘들어도 그 출발점엔 그저 평범한 인간 본능의 다툼들이 숨어 있다. 성상 논쟁도 그렇다. 과연 성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타당한 일인가? 혹시 그것은 우상숭배가 아닐까? 그래도 올바른 신앙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중세 초기 이와 관련된 논의들은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685-741)에 의하여 큰 다툼으로 발전한다.

레오 3세는 당시 외국의 군대와 맞서 힘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고군분투하며 제국을 지켰다. 그런데 레오 3세의 기대와 당시 군중들의 기대는 너무나 달랐다. 당시 총대주교 게르마노스는 성상을 들고 성벽을 따라 행진하였다. 이에 성상의 기적에 의하여 적군이 물러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레오 3세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이러한 민중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주술에 지나지 않은 것이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가로채 간 느낌이었을까? 레오 3세는 성상 파괴를 결정했다. 자신의 자리를 성상과 성상을 향한 주술적인 민중의 마음이 빼앗아 가 버렸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조용히 학자들 사이에 나돌던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될 때 문제는 정말 커진다.

▲ 레오 3세 황제를 새긴 금화.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뒤 제국의 중심이 아닌 제국의 변두리에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는 이러한 황제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물론 성상파괴를 반대했지만, 그가 정말 화난 까닭은 국가권력자인 황제가 교회권력의 고유한 역할마저 마음대로 침범한 것이다. 황제가 마음대로 성상 파괴라는 교회 내부적 사항을 결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2세와 레오 3세의 대립은 로마로부터 황제의 힘이 점점 줄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교황은 칼이 없었다. 칼이 없는 교황이 강력한 국가권력 앞에서 맞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론 당시 무거운 세금으로 인한 반-황제 여론 때문에 군인들이 성당에서 성상을 파괴할 때 강한 저지를 받으며 교황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교회를 지킬 순 없었다. 땅도 없고 칼도 없는 교회권력자인 교황은 불안했다.

당시 레오 3세 황제와 대립하던 랑고바르드의 왕 리우트프란드는 교황의 편에 선다. 교황은 기뻤다. 드디어 자신을 지켜 줄 칼이 등장한 것이다. 리우트프란드 왕 역시 레오 3세의 불의로부터 민중을 지켜 주고 교회를 지켜 준다는 이미지는 매우 달콤했다. 이런 가운데 리우트프란드 왕은 교황에게 땅을 주었다. 땅을 준 것인지 이에 대한 대가가 있었는지를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교황에게 드디어 땅이 생긴 것이다. 바로 최초의 ‘교황령’이다. 이런 와중에도 레오 3세 황제는 자신의 길을 갔다. 제국 전체에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레고리오 2세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2세는 곧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즉위한 그레고리오 3세도 물러서지 않았다. 731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자들을 파문해 버렸다. 반대로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는 더욱더 강경하게 성상파괴를 이어 갔다.

사실 중세의 황제는 교황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즉 자신들에 의하여 허락된 종교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니케아공의회를 열어 정통 신앙을 마련하고 그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마음대로 교황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로 세우려했다. 지방의 주교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황제가 내린 영주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중세의 제국은 그리스도의 제국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교회였다. 성상의 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자는 기적과 같은 것을 수단으로 자신의 민중에게 호감을 얻는 교회가 싫었다. 그리고 중세 후기엔 성상을 과도하게 숭배하며 자신들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싫었다. 그래서 교회에 개입했다. 그냥 황제의 뜻이었다. 황제만이 중세 유럽서 하나뿐인 권력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날개 아래 교회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많은 교회의 학자들은 이러한 황제의 논리에 도전하였다.

▲ 교황 그레고리오 2세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중세 후기 신학자들은 교회의 것과 국가의 것을 구분하려 노력하였다. 교황과 성직자가 해야 할 일과 황제와 행정가가 해야 할 일은 다르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실히 하려 하였다. 그때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오캄은 교황이 황제의 정치권력을 지지하며 그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권력을 누리며 살아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보았다. 교회는 국가권력의 도움이나 지지 속에 부유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청빈해야 했다. 오캄에게 교회는 청빈의 공간이다. 가난해야 했다. 하지만 오캄의 주장은 금지되었다. 이미 교회는 너무나 부유했다. 오캄의 이야기가 귀에 불편했을 것이다. 청빈 없이 국가권력에 아첨하며 누리는 소유욕이 주는 행복이 교회 고유의 행복은 아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국가와 달라야 했다. 교회는 교회가 아닌 곳의 가치와 다른 가치로 존재해야 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의 부정이 뉴스에 나온다. 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읽는다. 참 슬픈 시대다. ‘교회’가 ‘반-교회’ 혹은 ‘비-교회’의 가치로 존재하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황제 레오 3세의 간섭에 민중과 함께 반발하였다. 그러나 이제 민중들이 국가에게 교회를 신고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이다. 교회가 아닌 곳에서 교회의 악을 고발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중세기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지금 국가의 재판에서 사회적 악으로 재판을 받는 성직자와 수도자의 모습이 참으로 슬프기만 하다. 오캄은 무엇이라 이야기할까? 아마 청빈하지 않은 ‘교회’의 ‘반-교회’ 따라하기의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하지 않을까. 만일 교회가 가난했다면, 교회가 국가의 재판에 서는 일은 없었을지 모르겠다. 부유해진 교회, 이제 국가는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부유함을 채워 준다면 교회는 국가에 고개를 숙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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