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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희망의 시작은 바로 ‘나’다! ‘나’뿐이다[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유대칠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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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4  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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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캄의 정치학 읽기 4

철학의 욕망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향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철학은 추상적 실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추상적 실천으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향유할 수 없으며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몽상가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 오랜 시간 수많은 동서양의 사상들은 구체적 실천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향유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철학은 언제나 자신이 만든 마땅함, 당위를 지키고 쟁취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욕망하지도 않으며, 그를 향유하려 하지도 않으며, 구체적 실천이 아닌 추상적 실천만을 꿈꾼다면, 그것은 정말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몽상 속에서만 유의미한 철학이라면 그러한 철학은 죽은 철학이다. 적어도 죽어가는 철학이다. 어쩌면 철학의 순간, 철학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철학의 죽음을 목격하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죽어가는 나에게 “일어나 걸으라” 외치는 마음으로 철학에 빠져들지 모르겠다.

오캄이라면 떠오르는 철학 용어는 ‘유명론’이다. ‘유명론’이란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그저 사고 속의 개념뿐이란 철학적 입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론의 입장에서 신은 필연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보이는 모든 것을 지금과 다르게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전능한 존재다. 오캄은 신조차도 필연적 법칙 속에 구속되어 있다면, 과연 그러한 신이 전능한 신인지 의문한다. 그러면서 신 앞에 어떤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류의 뇌를 먹는 사마귀의 존재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좀처럼 흔하지 않은 경우다. 그러나 오캄은 이러한 놀람에 대하여 말한다. 이 세상은 원래 필연적이고 보편적이지 않다. 사마귀가 조류의 뇌를 먹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그것을 감각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다. 인간은 경험 세상 속에 살아갈 뿐이며, 그 경험 세상 속에서 만들어진 유사한 경험의 다발에 어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란 형식을 부과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함의 외부, 즉 인식 주관의 외부가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존재했던 것도 아닐 수 있다. 단지 사마귀에 대한 인간의 감각 경험으로 사마귀는 조류의 뇌를 먹지 않는다고 사고 속에 개념화했을 뿐이다. 오캄에게 ‘보편’과 ‘필연’이란 이러한 것이다. 보편과 필연은 사고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 속에 ‘만들어진 것’이나 ‘개념’일 뿐이다.

믿고 있던 보편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오캄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가길 원했으며, 어떤 구체적 삶을 향유하라 하였는가? 향유를 위한 구체적 실천으로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았을까? 오캄에겐 보편도 필연도 없다. 국가권력가인 황제도 아니고 교회권력가인 교황도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보편과 필연도 사고 속 개념일 뿐이다. 필연도 보편도 없는 세상, 있는 것이라곤 힘든 세상을 궁리하며 살아가는 ‘나’란 존재뿐이다. ‘나’란 존재만이 가장 확실하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그는 ‘나’를 강조한다.

   
▲ 윌리엄 오캄. (이미지 출처 = Ryan Reeves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황제와 교황이라는 두 권력 외에 또 하나의 권력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바로 ‘공중’(公衆)이다. ‘공중’은 정치참여와 공적 담론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사람의 집합이다. 이성적 사고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개인들의 집합이다. 그 공중이 또 하나의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했다. 그냥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대중’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나’의 집합이어야 한다. 마땅히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궁리하며 자신의 나아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는 결단의 주체로 ‘공중’이다. 공중은 국가권력자에게 당신들도 법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꾸짖었다. 교회권력자에게도 공중은 마땅히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자신들도 분노할 수 있음을 보였다.

중세 오랫동안 과연 보편권력자는 누구인가를 두고 황제와 교황은 다투었다. 황제는 자신이 유럽의 단 하나의 보편 권력자라 했다. 교황은 결국 인간 행복의 궁극인 구원의 관점에서 자신이 단 하나의 보편 권력자라 했다. 하지만 오캄은 이 모두를 부정한다. 보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연적인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수의 ‘나’뿐이며, 이 ‘나’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중’뿐이다. 유럽 곳곳에서 서서히 ‘공중’의 정당한 자기 권력 찾기가 이어졌다. 다들 알 듯이 영국의 '대헌장'이 그 시작이다. 교회에선 ‘공중’의 의견이 교회에 보다 더 잘 반영되는 ‘공의회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의 세상에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세상으로 변해 갔다.

철학의 욕망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싶은 욕망이다. 그는 영웅 없는 시대,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낸 흠도 있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보편적이지 않은 그래서 조금 변덕스럽고 실수로 가득한 역사의 공간, 그 삶의 공간을 원했다. 이러한 오캄의 고민은 그만의 고민이 아니다. 그와 같은 시대, 다른 이들에게도 보인다. 마르실리오 다 파도바는 교황과 황제의 보편권력 다툼에서 황제의 편에 섰다. 하지만 황제가 지상 유일한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권력자라고 보진 않았다. 그 황제의 권력이 권력으로 기능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공중’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을 가졌다는 이로부터 내려지는 명령을 들으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아닌, 고민하는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임인 공중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조금 느리지만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기 시간을 만들어 가는 역사, 그 삶의 방식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향유하려는 오캄과 마르실리오 다 파도바, 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엇인가 말해 준다. 참된 존재는 ‘나’다. 이 나라의 희망도 ‘나’다. 영웅적 존재가 아닌, 서로 다투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나’다. 희망의 시작은 영웅이 아닌 ‘나’다. 내 삶에게 “일어나 걸으라” 소리치며 실천할 이도 바로 ‘나’다. ‘나’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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