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30일(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

이번 주일 말씀은 마태오 복음서의 비유들로 이루어진 장이 마무리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 결론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느님나라의 절대성

두 개의 짧은 비유들이 하느님나라의 고유한 가치를 강조한다.(마태 13,44-46) 보물과 진주는 하느님나라가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절대적인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요구는 근원적이다. 모든 다른 것은 하느님나라 뒤에,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은 다 하느님나라와 관련되어 자리 잡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든 것은 하느님나라와 비교할 때 상대화되어야 한다. “숨겨진 보물”이나 “진주”를 찾는 것은 계산된 일의 결과물이 아니다. 비유들은 그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며, 운의 문제라고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 받을 자격이 있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앞에 있다고 상기시켜 주는 단순한 방식이다. 그러나 선물이 도착하면, 우리의 응답은 가진 모든 것을 그것과 교환하기 위하여 다 팔아야 하는 것이다.(13,44-45)

▲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기쁨은 하느님나라의 은총에 상응하는 반응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것은 그 행위를 마지못해 무슨 희생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해야 하고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기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관점에서 시작할 때 모든 것은 자기의 가치에 따라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교회의 책임을 갖는 것은 무슨 특권을 위한 구실이 될 수 없다. 여기에는 아무런 사적 소유라는 개념이 자리 잡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주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일 따름이다.

옳은 것을 분별하기 위하여 이해하기

이어지는 비유는 같은 장에서 먼저 나온 비유의 주제를 취한다.(13,36-43) 하느님나라의 선물은 우리를 분별로 초대한다. 하느님나라가 왔을 때, 사람들은 그 나라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다른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옳은 것을 알기 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1열왕 3,12)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하여(로마 8,28) 분별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나라가 어떤 것인지 가르치고 난 뒤, 주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물을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13,51)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분이 제시했던 모든 대조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교사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 칭찬한다. 교사는 그의 삶 속에서 하느님나라의 보물인 제자됨을 분별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된다. 교사는 삶 안에서 하느님나라에 의해 드러난 사랑의 뜻을 완성하기 위하여 애쓴다. 그가 주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므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고 “새롭고도 오래된 보물을 꺼낼 수 있다.”(13,52)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청하는 복음사가, 마태오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인 율법학자의 모범이다. 그는 먼저 그 자신이 메시지를 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의 메시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말들은 우리가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명석한 머리를 주십시오.”(1열왕 3,9)라고 청하는 것을 잊을 때 교회 안에서 자주 보이는 것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들리지 않는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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