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9일(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마태오 복음서는 심오한 교회 체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그의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계시를 받은 이들

오늘,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구절을 읽게 된다. 배경은 하나의 기도요, 감사이며 논리적 질문이기도 하다: 이유가 무엇인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사람들”(마태 11,25)은 율법학자들, 대사제들과 신학자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 시대에 사회 종교 권력을 쥐고 있었던 소수를 뜻한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23,2)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지식의 열쇠”(루카 11,52)를 차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고 자신만만한 사람들로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며 그 해석에도 정통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선언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철부지들”을 본다.(마태 11,25) 마태오가 사용했던 그리스 말은 분명히 무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사람들”이지만, 도덕적이고 영적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힘에 의해 적절한 길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교사들의 안내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철부지들”이란 말은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 죄인들, 병자들, 목자가 없는 양떼, 복음에서 언급된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국가의 가난한 사람들” 전체와 비슷한 의미다.

이들에게 계시가 먼저 알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의 종교세계는 그 토대에서부터 침식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특권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런 철부지들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안내가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버지의 자비로운 뜻

우리는 무지가 덕이며 똑똑한 것은 결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거나, 무지한 사람들이 항상 겸손한 사람들은 아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호는 근본적으로 어떤 도덕적 종교적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관과 우선순위들을 전도시키며 하느님이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을 우리에게 드러내듯이,(마태 11,27) 이 세계의 무시받는 이들은 하느님이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권력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우리를 이끌어야 할 주님의 말씀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좋은 교훈이다. 이러한 선호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의지 속에, 그분의 무상의 사랑(11,26)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감사하는 이유이며 동기다.

주님의 기도(“아버지, 당신께 감사합니다.” 마태 11,25)는 우리에게도 그와 똑같이 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유롭고도 무상적인 사랑은 모든 것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연대하고 그들에게 투신하도록 주님이 요청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니”,(11,30) 왜냐하면 그 멍에는 사랑 안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말을 타고 거만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즈카 9,9)오시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죄와 죽음의 몸을 따르지 말고 사랑과 생명의 성령에 따라 살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로마 8,11-13)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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