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23일(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이미 말한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의 13장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몇 가지 비유로 구성된다. 비유들은 모두 역사에 나타나는 하느님나라가 과정 중에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나라는 갑자기 도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간 속에서 하느님나라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분별

마태오 복음에 자주 나오는 주제 중 하나는 심판(마태 7,21-13; 25,31-46)인데, 그것은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때,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 의하여 살고 싶은 대로 삶의 모습이 나타나는 때다. 이것이 또한 가라지 비유의 초점이다. 제자들이 비유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것은 이 비유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강조한다.(13,36) 또한 비유의 메시지가 예리하고 결정적일수록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 마지막에는 대답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과 이웃에게 예라고 말한 사람들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구체적 행위로 사랑을 표현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은 하느님나라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13,24-30)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까지 살펴보실 것이다.(로마 8,27)

밀인가 가라지인가: 모호한 위치나 미온적 자세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침해받는 상황에 직면할 때 단순히 방관자의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을 선택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공범자가 될 뿐이다. 심판의 날은 이미 지금 우리들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주님께서는 요구하며 또한 친절하다. 그분은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를 누르지 않는다.(지혜 12,16)

그러나 다시 한번, 마지막 시간은 과정이 끝날 때에만 올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라지들을 즉시 치워 버리지 않는다. 회심에 대한 그분의 요청은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명을 주는 밀이 되도록 요청받고 있다.

▲ 밀 (이미지 출처 = Pixabay)

작은 것으로부터

하느님나라의 시작은 겨자씨같이 아주 작은 것일 수 있다. 작은 것이 지니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지나쳐 버릴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좋은 토양을 환영하고 그것을 키운다면, 씨앗은 자라 생명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생명을 주게 될 것이다. 새들이 그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새로운 생명들이 늘어날 것이다.(13,31-32) 시간이 모든 것들을 성숙케 할 것이나, 모든 것들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게 보여지던 하늘나라와 그 나라의 하느님을 분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 뒤에 감추어 계신다. 하느님나라는 이 세계의 권력가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에게서 빠져나간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성장의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의 변혁이라는 문제다. 하느님나라는 누룩으로서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며, 그 반죽에 새로운 생명을 준다.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것이 활기를 띄게 된다. 무미건조하던 것이 맛을 되찾게 된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것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생명을 주는 것이다.(13,33) 그런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변화는 어떤 리듬에 따라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누룩이 가져오는 생명은 항상 현존하고, 모든 것들을 뿌리로부터 바꾸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먼지를 양분이 되는 빵으로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 은총의 누룩을 환영하는 것은 우리를 양분이 되게 하고 이웃을 섬기게 해 주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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