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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물음표를 던지다[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변지영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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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3  10: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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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스물두 살, 한 교양필수과목 수강 중에 자서전을 만드는 과제가 있었다.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물음표를 던지다’. 당시 자서전에 붙인 제목이었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찬 물음표는 당시 나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 책머리에 ‘어쩌면 내 인생은 수많은 독후감들과 영화감상으로 가득한 모음집’이라고 표현하며, 그때까지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책과 영화, 그리고 실존 인물에 대해 적고 그들이 내게 어떤 파동을 일으켰는지를 써 내려갔었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자신만만해 했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고, 현재의 삶에도 만족하는.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청춘이었다.

2017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새로운 길모퉁이에 이르렀다. 지금의 내게 청춘이란 길고 지난한 터널이었다. 끝이 있는 것은 아는데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고 시종일관 컴컴하고 답답한. 과거의 내가 사무치게 그리울 정도로 인생에 대한 포부와 자신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꾸었던 꿈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꿈이 뭔지 몰라서 내가 누군지 몰라서 제자리걸음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드라마틱하거나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어 버렸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운명론자였다. 세상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 속에 이루어지고 나의 길 역시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그래서 산다는 것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그냥 나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되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하고 본능에 충실하면서, 나쁜 짓만 안 하도록 노력하는 틀 안에서. 미리 알 수는 없어도 어차피 정해진 인생이니, 그리고 왠지 내 인생은 끝까지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기대와 희망 속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유의지란 너무도 무겁고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까지의 나는 기도를 할 때면 ‘주님, 당신이 주신 제 길을 알려 주세요. 그것만 알면 저는 주저 않고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당신이 나를 만드셨고 저라는 사람은 그 길을 걸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라며 운명에 대한 확실한 표징만을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마음속에서 자꾸만 ‘유다’가 떠올랐다.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유다. 유다의 운명은 얼마나 가혹한가? 예수님의 인간 구원 사업의 희생자라니. 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유다는 그저 예수님의 시나리오 속에서 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다. 아니 그렇다면 이건 너무 억울한데?

뜬금없이 내 인생에 나타난 유다. 그의 존재가 오랜 시간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자유의지’에 대한 의식을 일깨웠다. 만일 유다가 운명대로 살다 갔을 뿐이라면 신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그럴 리 없었다.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것도 끝내 스승을 팔고 죽음으로 내몬 것도 그의 의지요 선택이었다. 유다의 삶은 자유의지의 결과물이었다. 신에 비하면 개미만도 못한 우리의 선택에 그분이 개입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또 다른 불가사의한 영역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하느님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 정해진 운명이란 없는 것이었다. 내 의지가 곧 운명이 되는 것이었다. 오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라는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 운명의 집은 작은 벽돌 한 장마저 모조리 내 몫이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인생이란 얼마나 어두컴컴하며 어렵고 두려운 것인가. 벽돌 한 장이 어떤 연쇄 작용을 일으킬지 누가 아는가. 나는 일상의 아주 작은 선택에서조차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일까? 이래도 될까? 이것은 합리적일까? 더 많은 정보와 노력이 있어야지만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런 와중에 대학생이라는 울타리도 유효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길목에 들어서니 그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분명 한때에는 확실한 꿈이 있었는데 이제 그 모든 꿈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흐르는 대로 흘러가려는 게으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꿈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현실적으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자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바람에 돛대를 맡기고 신나게 나아갔는데 바람조차 없는 바다 위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일 뿐이었다.

그렇게 5년 만에 서울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나약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걸 원해도 될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 속에. 제자리걸음을 하며 과거의 모든 흔적이 남아 있는 방 안에 박혀 그 흔적들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마치 유다가 나타나 내 삶에 자유의지라는 과제를 던지고 간 것과 같이,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들은 내게 또 다른 중요한 운명에 대한 가르침을 줬다. ‘본성’에 관한 것이었다. 5년 전, 10년 전의 나 역시 ‘나’였다. 다양한 경험 속에서 분명 성장했고 달라졌지만 일관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점들이 있었다. 개를 개답게 하고 고양이를 고양이답게 하는 본능이 있듯. 나에게는 부여받은 ‘영혼’이란 것이 있었다. 모든 일기와 독후감들은 누가 읽어도 ‘나’였다. 나는 절대자가 창조한 존재로서 그 존재의 시작마저 자유의지의 영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운명이란 본성과 자유의지의 조합이었다.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라는 에세이의 한 구절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세상 속에서 지치고 상처 입으며 돌아온 네 머리맡에 앨런 배스가 한 말이 담긴 이런 메모를 놓아 주고 싶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이다.’”

인간으로서 어떤 불완전함을 지니고 태어나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의지로써 노력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운명이었다. 그 모든 여정이 나의 길이 될 것이었다. 그것이 일자로 뻗은 고속도로일 리는 희박했다. 때론 광야에 선 이스라엘 백성처럼 방황하고, 낭떠러지를 만나고, 화창한 햇살에 웃기도 거센 비바람에 찡그리기도 하는. 또한 어떤 선택이든 내 소중한 여정이 되는 것이었다. 길이란 그 길 자체로 훌륭한 것이 있다기보다는 길을 걷는 사람의 감정이 기준이 되기 마련이므로.

그 눈물겨운 깨달음 뒤에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녹음을 걷던 시절의 자서전 속의 나를 다시 돌아봤다. 빨강머리 앤을 동경하고 낯선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하며, 언젠가 데미안이 되어 있는 나를 꿈꾸는 싱클레어.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일하고, 모르고, 몰려 있는 세상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정신을 찬양하는 사람.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떤 문화 속에서 자라났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 그 사람의 모습대로 살면 되는 것이었다. 그 본성에 자유의지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덧대어 다시 없을 인생을 꾸려 나가려 하면 되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무언가가 변하진 않았다. 낯선 곳으로 떠나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긴 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어리고 불안한 존재 그대로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조금은 생겼다는 것이 청춘의 터널에서 녹음의 향기를 맡았다는 증표랄까. 여름이다. 백세 시대에 스물다섯은 딱 사분의 일.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됐다. 이 여름의 끝에 어떤 길모퉁이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 모퉁이는 그저 인생은 정해진 것이라며 대책 없이 낙관하기만 하던 시절, 오로지 자유의지로만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며 의지의 행사를 두려워하던 시절을 지나 본성과 의지의 균형 속에 만나게 될 길모퉁이다.

   
▲ 인간으로서 어떤 불완전함을 지니고 태어나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의지로써 노력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운명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끝으로,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기괴함 덕분에 오히려 청년의 모습이 되자 세상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벤자민 버튼이 딸에게 보냈던 편지를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나누고 싶다.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언제든 늦은 게 아니란다.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렴. 시간 제한 같은 것은 없으니 언제든 네가 원할 때 시작하렴. 너는 변화를 택할 수도 혹은 그대로 머무르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어. 변하거나 머무르는 데에는 규칙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최고를 만들 수도 최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나는 네가 최고를 만들어 내길 희망한단다. 너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보고 네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 보길 바라. 같은 것을 봐도 너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 봤으면 하며 너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에 네가 가고 있는 길이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엔, 네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오늘로 변지영의 '지금여기 청춘' 연재를 마칩니다. 2년 3달 동안 매달 깨어 있는 청년의 목소리로 시사비평을 해 주신 변지영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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