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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문화 바꾸기 - 전례와 언어 5 : “그럼 미사 안 해 준다!”[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황경훈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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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07  17: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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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미사 안 해 준다!” 가톨릭대학생연합회(이하 가대연)에서 활동할 때 지도신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한 30년 전의 일이니 한 세대가 에누리 없이 지난 날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말투며 표정이 왜 이처럼 생생할까. 당시 가대연에서는 ‘월례강좌’와 농촌활동(농활), 겨울 수련회나 피정 등의 주제와 강사를 정할 때마다 지도사제와 갈등을 적잖이 겪었다. 임원을 맡았던 덕분에 직접 대면해 사정하고 또 설득하는 등 ‘능력’을 총동원해 보아도 통하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언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한마디, “그럼 미사 안 해 준다”. 월례강좌에 단골손님으로 백기완, 박현채, 리영희 선생 같은 ‘운동권’을 불러 대고, 농활도 ‘봉사’와 거리가 먼 러시아 혁명 당시의 ‘브나로드’ 운동의 한국적 토착화라고나 할까, “민중 속으로”라는 정치 의식화 운동이었으니 보수적인 사제는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제도 있었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1980년 중반은 ‘광주사태’로 불리던 광주학살의 악몽과 패배감에서 서서히 벗어나던 시기였고, 달마다 열었던 ‘월례강좌’는 지역의 운동권을 집결시키는 제법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은 남의 얘기거니 생각했고, 정작 훨씬 절박했던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공개기구 운동’의 임무와 사명을 어김없이 해내는 것이었다. 상, 하반기 월례강좌의 첫 강좌는 예외 없이 ‘개강 미사’로 시작되었고 또 모든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이 그러했으니 임기를 맡았던 2년 가까이 그런 대거리는 피할 수 없었다. ‘미사를 해야 한다’는 관념은 학생들 내부에서도 ‘교회적 색깔을 띠려면 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매우 외피론적인 목적의식의 발로이었거나 아니면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녀 버릇하던 무의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랐지만 좌우지간 빠지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어쨌든 미사를 ‘소유’한 것처럼 말하는 사제에게 ‘미사가 해 주고 말고 하는 무슨 흥정거리라도 된다는 말이냐’고 제대로 따지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전략적으로는 잘했다고 자위한다. 월례발표고 농활이고 뭐고 하고 못하고는 사제가 그 칼자루를 쥐고 있었고 따라서 ‘정면 대결’을 피하며 적당한 타협으로 프로그램을 끊이지 않고 진행해 온 것은 큰 소득이었기 때문이다.(물론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가슴속은 번번이 실망과 분노로 시퍼렇게 멍들어 갔다.

50여 년을 가톨릭 신자로 살면서 ‘이성’이라는 사리분별 또는 비판의식을 갖기 시작한 뒤로 과연 몇 번이나 의미 있는 미사를 드렸던가. 신앙 때문인지 아니면 미련 때문인지 가대연 활동을 끝내고 몇 년 뒤에 교구청년연합회에서도 임원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지도신부는 우리와 ‘코드’가 맞는 비슷한 ‘진보적 이념’을 갖고 있었고 전례도 판에 박히지 않는 듯한 융통성이 있었다. 어느 수련회였던가. 산 정상에 올라 열명 남짓한 이들이 빙 둘러앉아서 드린 미사는, 그리고 떡과 막걸리로 대신한 성체성사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물론 가대연이나 청년연합회 연대활동에서 노동사목이나 빈민회, 농민회 행사에 가면 떡과 막걸리, 또는 제병이 아닌 실제 빵과 포도주를 미사 때 사용하는 경우는 종종 접한 터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떡과 막걸리는 민중의 땀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먹거리입니다. 떡과 막걸리가 자신을 바쳐 우리를 살렸듯 우리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갑시다.”라는 사제의 말은 더 없이 감동적인 것이었다. 제법 커다란 막걸리 사발이 한 바퀴를 돌고 나자 누군가 너스레를 떨었다. “(미사에는) 막걸리와 떡이 더 좋은데요!”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탈’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 전례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본격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미사는 사제의 소유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여기 자료사진)

건조하고 ‘재미없는’ 미사보다 기쁘면서도 가슴 벅찬,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미사를 실험해 보는 것이, 비록 교리나 교의의 관점에서 흡족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의문이다. 많은 신학적 설명과 전례학적 의미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미사가 식사 만찬을 동반하는 제사라면 그 잔치에 참가한 이들을 배려하는 방향이라야 그 뜻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은 거의 혁명적 수준이었지만, 오히려 우리 교회가 그 개혁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교조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더욱더 지역에 맞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를 폐막하면서 평소의 지론대로 “교조적 엄격함보다는 자비가 더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사실 이 대목은 교황이 자비의 해를 폐막하면서 ‘사제들에게 한시적으로 허용됐던 낙태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연장한다’는 내용을 언론이 앞다투어 전하면서 다시 한번 그의 정신이 돋보였다. 여기서 자비가 전례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 핵심은 신자들을 향하고 있는 바로 그 자비와 배려의 정신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보인다.

“그럼 미사 안 해 준다”라는 말을 사제가 자연스럽게 하는 교회문화는 미사를 주재하는 소수의 사제와 이들이 독점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진리와, 그리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대다수의 ‘대상화된 신자’라는 왜곡된 관계를 반영한다. 이것은 미사의 근본정신과 신학에도 어긋난다. 미사가 예수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재현하는 장이라면, 그 안에서 예수뿐만 아니라 신자도 자신의 몸을 제단에 함께 바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곧 우리가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의 몸을 받아먹고 잠시 동안만 예수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제단에 몸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사가 갖는 근본적인 구원론적 의미다.

따라서 평신도의 입장에서 봤을 때 평신도의 참여 없는 미사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미사 안 해 준다’는 근거 없는 왜곡은 용인될 수 없는 사제의 무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초기교회 때와 현재의 성찬의 전례가 변화해 왔듯이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그 방향은 늘 당대를 살고 있는 인간과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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