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어느 은퇴 사제가 2009년 한 언론에 기고한 칼럼의 제목이다.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사 때마다 지난 2005년 3월 한국 천주교주교회의에서 펴낸 "성경"을 봉독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한마디로 ‘이건 아니다!’ 이다. 시도 때도 없이 해 대는 예수의 반말지거리가 그 이유다.... 서양 말엔 존댓말 반말이 따로 없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말은 그게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어쩌자고 2005년 "성경"은 예수를 이렇게까지 아무한테나 반말하는 버릇없는 사내로 격하시켜 놓았을까?” 옆에서 듣기만 해도 분통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이어 그는 신구교 일치운동의 상징인 "공동번역 신약성서"와 "공동번역 성서", 또 (가톨릭의) "200주년 신약성서"와 새로 나온 "성경"을 ‘예수의 반말’ 여부를 기준으로 비교하고 있다. “"성경"이 나왔을 때, 나는 번역에 종사했던 분의 해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충정이었다는 것. 납득이 안 간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납득이 가겠는가!) 그러면서 2009년 돌베개에서 나온 "예수전"의 작가 김규항("고래가 그랬어"로 널리 알려진)이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인데, 반말하는 예수는 교회의 그런 의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힌다. 여기까지는 '반말하는 예수'에 대한 성서 번역과 교회 당국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어 그는 예수의 반말과 '반말하는 사제'를 연결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반말이야말로 권위의 상징이라고 믿는 이들이 "성경"에서 예수를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면 그들의 사고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본당 교우들에게 반말하는 일부 사제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터다.” 결국 예수의 반말이 ‘교우라면 아무에게나’ 반말해대는 사제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 같다. 사실 본당 안팎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게 드문 편이 아니고, 일종의 ‘문화’ 비슷하게 자리 잡아서 특별히 사족을 달거나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문제는 지난 세 번에 걸쳐서 썼던 교회의 ‘전례와 언어’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영성을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나 오는 대림 때부터 사용한다는 "새 미사 경본", 또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예수’가 특히 두드러지는 "성경"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나 성숙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 아니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다른 지면에서 더 다루기로 하고, 이 사제가 4종의 성서에서 뽑은 ‘반말하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보자.

유대의 최고 권력자인 총독 앞에 ‘죄인’으로 끌려 나온 예수와 일문일답하는 심문 장면이다.

“빌라도: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예수: 그 말이 당신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까?(1971년 "공동번역 신약성서")

빌라도: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예수: 그것은 네 말이다.(1977년 "공동번역 성서")

빌라도: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요?
예수: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다.(1998년 "200주년 신약성서")

빌라도: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
예수: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2005년 "성경")”

▲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공동번역 성서(가톨릭용)"와 한국 천주교주교회의가 2005년 발행한 "성경" ⓒ왕기리 기자

예수가 신이 아니라 교리 대로 ‘완전한 인간’이라면 재판장은 존댓말을 하고 피고인인 예수가 반말을 한다는 것은 상식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교리상으로도 왜곡이다. 여기에 더해 예수가 중풍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대목을 보자. 요한 복음 5장 5-7절에 따르면 환자는 38년 동안이나 앓아 온 사람으로 나이도 예수보다 상당히 많았을 것이고 또 수십 년을 앓아 오면서 몹시도 지치고 힘든 처지였음이 분명하다. 이를 측은히 여긴 예수의 태도는 ‘안 봐도 비디오’이지 않을까. “건강해지고 싶으냐?”("성경")가 아니라 “당신은 건강해지기를 원합니까?”("200주년 신약성서")라고 묻지 않았을까.(의미심장한 말이지만, 사실 이 말도 어색하기는 하다) 아주 오만방자한 의사라고 하더라도 몇십 년 동안 병으로 고통을 받아온 병자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반말로 묻지는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왜곡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 예수를 신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정말로 ‘예수의 권위를 위한 충정’의 발로였을까. 그 진심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권위를 반말에서 찾는다니 예수가 무슨 조폭 두목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2005년 1월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이라는 잡지에 “"공동번역 성서"는 살려야 한다”라는 기고문을 냈다. 우리 논의와 관련해서만 말해 본다면, 첫째, “공동번역보다 읽기 어렵고 당연히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적다”(공청회 때 성서학자 김혜윤 수녀가 한 말)면 신자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마음 안에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어떻게든 ‘교회일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지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일미사" 책을 새 번역과 공동번역의 두 종류로 만들어 사제와 신자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도 공동번역을 살리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신자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라면 가능했을 이런 제안들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말하는 예수와 반말하는 사제가 닮아 있다면, 권위를 헐벗고 굶주린 가장 낮은 이들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반말에서 찾고 그것을 예수와 동일시한다면, 그 문화는 반복음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권위적인 한국 천주교회 문화가 여기서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는 건 아닌가 성찰해 볼 일이다. 반말이라는 행태 속에서 사제가 의식, 무의식 중에 예수와의 자기동일성을 찾는다면 이보다 더 심한 왜곡은 없을 것이며 ‘친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치명적 독소가 될 수 있다. 신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제들의 결단과 실천이 필요해 보인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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