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6월 4일(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교의 대축일 중 하나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현존하는 성령의 힘을 기념한다.

성령과 두려움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 로마 권력과 야합하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맞서야 하는 일은 그들에게 공포를 일으킨다. “유다인들이 두려워”(요한 20,19) 그들은 문을 잠그고 방안에 모여 있다. 스승은 그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평화, 샬롬을 주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온전한 삶, 정의와 조화의 추구를 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을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명을 계속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는데, 그들은 더욱더 두려움을 느낀다(요한 20,21)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마주칠 저항과 적대감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용기를 가지라고 청한다.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음으로써 복음선포를 할 수 있을 것이다(요한 20,22). 그것은 사랑의 성령이며, 요한이 그의 첫 번째 서간에서 말한 것처럼(1요한 4,18), 두려움과는 정반대다. 실상, 분명하게 말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 안에,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성령은 생명과 진리에 대한 권리들이 훼손당하고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야 한다. 권력가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비가 되고, 사회에서 우리의 안락과 특권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의 성령을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각자 자기 지방 말로

▲ '성령강림’, 엘 그레코(1596) (이미지 출처 = wikiart.org)
이스라엘에서, 성령 강림은 원래 추수감사제였다(탈출 23,16. 34,22). 후에 그것은 농경 축제에서 시나이 산의 계명선포를 기념하는 역사적 축제로 바뀌었다. 그 날은 이스라엘 도시가 각지에서 축제에 오는 유대교인들로 가득 찬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너무나 두려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한 데 모여있다. 그러나 성령의 선물을 받아 그들은 강화되고 이스라엘 도시에 오는 모든 민족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할 것이다(사도 2,1-11).

성령의 영감을 받고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데 적절한 말을 발견한다. 성경의 이 구절은 우리에게 자주 해석되는 것과 반대되는 중요한 내용을 자세히 알려준다. 단지 같은 말을 했다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성경의 이 부분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듣고 어리둥절해 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사도 2,6-7).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말로, 자신들의 문화적 세계의 말로 알아듣는다.

이처럼, 복음화란 획일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메시지에 충실하고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이며, 모든 지체가 역할을 갖는(1코린 12장) 일치이며 친교다. 모든 구성원이 고려되고 따라서 각자의 카리스마가 존중되어야 한다. 성령 강림 축제는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용기를 가지며 참다운 교회적 일치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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