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5월 7일(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불확실함 가운데에서, 오늘의 전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알아보도록 초대하고 있다.

풍요로운 생명

예수님을 착한 목자라고 부름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기억에 영향을 미쳤던 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이 이미지도 농촌의 체험과 연관된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양떼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목자로 제시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알고, 그들을 이름으로 부른다(요한 10,3); 그분은 양떼 가까이 있다. 양들도 그분을 알며,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본다”(10,4) 이러한 쌍방의 앎은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게 결속시키는데, 이는 특히 성경의 맥락에서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리가 기억할 때에 더욱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호 사랑의 깊은 의존관계를 만들어내는 친밀한 앎을 다루고 있는데, 요한 복음 10장 시작에서 착한 목자가 도둑과 강도의 정반대라고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요한 10,1) 양들은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10,5)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더 풍요로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다.(10,10)

▲ 목자와 양.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우리들은 매우 중대한 양자택일 앞에 직면해 있다. 생명인가 죽음인가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책임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 보게 만든다. 인도해야 할 과제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어야 하며, 그들의 요구와 희망들을 알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착한 목자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정의와 기쁨의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야 한다.(요한 10,7-9) 사목적 책임은 특권이 아니라 섬김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 고통과 그들이 견뎌야 하는 억압들을 무시하는 목자는 낯선 이가 되고 마침내는,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도둑이요 강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은 늘 모험이다. 주님의 경고는 준엄하고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최근에 언론은, 리마의 어떤 곳에서 일어났던 잔인한 철거사건을 보도했다. 재판관, 말하자면 정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고용된 경호원이 제복을 입거나 혹은 입지 않고, 말을 타거나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법을 떠받들고 있었으나 정의나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오막살이집들을 태우고 빈약한 세간살이들은 엉망이 되었으며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마 죽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다루기도 했다. 부활한 예수님을 선포하는 베드로의 강론을 들은 뒤 청중들은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이것은 하느님이 선택했으나 사람들에게서는 버림받았던 존재의 메시지에 대한 적절한 질문이다.(1베드 2,4) 우리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온 착한 목자를 어떻게 선포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 강도가 되기보다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